“여기랑 안 맞는 거 같은데, 왜 이러고 있어요?”
어느 여름날, 무방비 상태에서 강력한 펀치를 맞았다.
얼얼하다. 그렇게 나의 현실 자각 타임은 시작되었다.
여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촬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연광이지만, 현장 진행을 챙기는 스텝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자외선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예정대로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 각 파트별로 진행 상황을 점검하러 이동했다. 세팅 상황을 확인하면서 일상적인 대화도 편하게 나눈다.
“직장 다니면서, 월급으로는 돈 못 모아요”
주식, 월급, 재테크 등등 대화의 주제가 돈으로 넘어가자, 누군가 말했다. 나도 안다. 대기업 연봉도 아닌, 나의 월급은 겨우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플러스라는 건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다. 나도 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재테크는 나에게는 너무 다른 세상 얘기예요. 회사 다니면서 월급 받아서 저금해야지”
“자본금 어느 정도만 있으면, 자기 사업을 하는 게 좋아요. 물론 대표가 일을 많이 해야지.”
“그 정도 돈은 있는데… 근데, 그렇다고 무조건 사업이라니… ”
모든 직장인들이 생각해봤을 거다.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탈을 꿈꾼다. 다방면의 출구를 생각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결국은 제자리에 멈춘다.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때마침, 알람이 왔다. 촬영 준비가 다 끝났다는 스태프의 메시지다. 그래, 세상은 정글이다. 나가면, 개고생이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일이나 하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여기랑 안 맞는 거 같은데, 왜 이러고 있어요?”
첫 번째 장소에서 촬영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세팅을 옮기기 위해, 간단히 물건을 챙겨서 걸어가는 중에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그 사이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계획대로 촬영 준비를 하고, 진행을 하는 순조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얘기에 당황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뭐” 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웃기 힘들었다. 이렇게 강력한 펀치는 처음이다. 내상이 꽤 크다. 얼얼하다. 무방비 상태에서 제대로 현타를 맞았다.
독립한 적은 없다.
그러나 내 안에는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절망과 두려움에 대한 트라우마.
회사를 차리라는 얘기. 그동안 일하면서 종종 들었다. 그럴 때마다 ‘말이 쉽지. 회사를 차리면, 신경 쓸 일이 많다. 피곤하고, 귀찮다. 감당하기 힘들다’ 고 말했다. 그건 나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도 상기시켰다.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무모하지도 않다. 그리고 내 안에는 독립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벌써 16년이 지났다. 그 당시 작품 프로젝트로 만난 실장님이랑 호흡이 좋았다. 영화 마케팅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는 분이었고, 힘든 일도 함께 나눠가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이였다. 계속 같이 일하고 싶은 분이었다. 그래서 실장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회사를 차리라고, 일은 내가 많이 하겠다고. 나 때문은 아니지만, 실장님은 큰 결심을 하고 영화 마케팅 대행사를 차렸다. 우리끼리 즐겁게 일하면서 회사를 꾸려가고 싶었다. 이건 대단한 포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마음과 달랐다. 당시 영화계는 불황이었고, 신생 회사가 자리잡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일은 누구보다 열심히, 잘할 수 있지만 비즈니스 앞에서는 한없이 서툴렀다. 좋고 나쁨이 명확하고, 자존심만 강한 우리의 입지는 점점 좁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다. 회사는 동아리 모음이 아닌데, 대책 없이 이상을 꿈꾸었다. 현실은 냉정했다. 2년도 되기 전에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작게 시작한 회사는, 어느새 조용히 소멸되었다. 당시 나는 대표는 아니었지만, 회사의 시작과 끝을 옆에서 함께하면서 희망과 절망을 모두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 시간들은 나에게 독립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트라우마로 남았다.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어느 여름날, 업무 관계로만 소통하는 사이였던 스탭이 던진 말은 나를 자극했다. 퇴근 후 집에 가는 길에,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카페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내 안에 있는 답답함과 일탈, 욕구에 자극을 안겨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당시 회사에서의 일은 나름 안정적이었다. 업무는 익숙하고, 팀원들과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난관에 부딪쳐도 같이 길을 찾아 헤쳐나가고, 서로를 챙겨주면서 일하는 완벽한 팀워크다. 그럼에도, 나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영화 개봉을 하고, 잠시 숨 돌리고 또 영화 개봉을 하고를 반복하면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늙어갈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했다. 어떤 길을 가도, 미련이 남을 것 같다. 그렇다면, 더 늙기 전에 도전을 선택하고 싶다.
그동안 여러 이슈가 있는 작품을 개봉하면서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준비하면서,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와 전략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내가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면 되는지 깨달았다. 철없이 이상만 꿈꾸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도 독립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이 조금씩 붙었다. 나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도록, 나의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의 트라우마를 보란 듯이 깨고 싶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독립을 준비한다. 천천히, 하나씩, 소신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