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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Oct 17. 2024

가을

가을이 소리 없이 왔다가 마지못해 떠밀려 간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온다는 말은 언제 여름이 끝났는지 미처 느낄 사이도 없이 가을을 맞는다는 말이고, 본격적으로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려 하면 어느새 차가운 겨울의 초입에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뜻이리라. 원래 가을은 결실의 계절, 풍요한 계절, 사색의 계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지위를 여름과 겨울이 빼앗아 버렸다.

      

장마 끝 불볕더위와 길가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가을이 오는 것을 알려준다면, 쓸쓸한 바람에 휩쓸려 길가를 뒹구는 단풍 낙엽이 가을이 끝났음을 알려준다. 모처럼 동네 수목원 산책을 겸해 집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기운이 왕성한 한낮의 햇살이 발뒤꿈치를 잡는다. 자외선 지수가 낮아져서 그런지 눈 부신 햇살이 한여름의 따가움을 주지는 못하면서도, 제법 여름 햇살 흉내를 내고 있다. 그 모습이 가엽기도 해서 그냥 묵묵히 햇살을 피해 주는 척 그늘 따라 걷는다. 그래, 그래야 너도 힘겹게 내리쬔 보람이라도 있지 않겠니? 그렇게 가을 햇살을 토닥여 본다. 

    

수목원 가는 길은 언제나 변함없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침목은 인생의 무게라도 되는 듯한 선로를 묵묵히 짊어지고 끝없이 펼쳐있고, 사람들은 보폭을 맞춰 그 위를 걷는다. 철로는 마치 서두를 것 없다는 인생의 진리라도 가르쳐 주려는 듯하다. 서둘러 걷다가는 침목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므로, 차분히 발아래를 살피며 걸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내 목덜미 뒤로 땀이 맺힌다. 채 쫓겨 가지 않은 늦여름이 아직은 가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햇볕이 내리쬐는 철로 위에서 시원한 그늘이 가득한 수목원 숲길로 발을 돌린다.

      

오랜만에 바람 소리를 듣는다. 거센 태풍을 예견하는 한여름 바람 소리조차 가을바람 소리에는 비견할 바가 못 된다. 어떻게 바람에서 쏴 하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의 물소리가 날까? 가을바람만 낼 수 있는 소리다. 나는 그 소리를 좋아한다. 산책로 주변의 화단에 서서히 삶을 정리하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힘에 겨운 얼굴로 올려보고 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안타까움이나 서운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려는 듯, 흔드는 바람에 얼굴을 맡길 뿐이다. 사람들은 봄을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을이야말로 이듬해 봄에 싹을 틔울 씨앗을 잉태하는 시기이며, 그 씨앗을 겨울이 되어 땅이 얼기 전에 대지에 뿌리는 시기이다. 그러니 진정한 생명이 움트는 시기는 바로 가을 아니겠는가.

    

수목원 곳곳에 세워진 정자 위에는 상춘객이 아닌, 가을의 정취를 즐기러 나온 상추秋객으로 가득하고, 넓은 잔디 광장에는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꽃잎이 지고 나뭇잎이 떨어져 가는 수목원 풍경은 인생의 가을을 달리고 있지만, 그 안에서 한창 봄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을 본다. 가을이 봄을 품고 있다. 그래서 가을은 넉넉한 계절인지도 모른다. 

     

수목원을 한 바퀴 돌다 보니 여름까지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뜬금없는 노란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논이다. 필경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 모를 심었다면 그동안 지나치면서 보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도 분명 가을이기에 가능한 것 같았다. 나뭇잎이 우거진 여름의 초록이 볏줄기의 초록까지 삼켜 버렸음이 분명하다. 넓이를 보면 그다지 작은 면적이 아닌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이제 집에서 아침에 창을 열면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머지않아 그 바람은 초록 나뭇잎을 오색으로 물들였다가 겨울바람에 밀려 떠날 즈음 색 잃은 나뭇잎과 함께 떠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을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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