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문학관에 도착하니 문학관 앞에는 유족이 부여군에 기증한 생가가 아주 깨끗하고 단장된 채 자리하고 있었다.
문학관 1층 좌측은 다양한 서적과 기념품을 무인 판매(현금이 없을 시 계좌이체를 하면 된다.)하는 장소와 조금 더 안쪽으로는 문학관 근무자가 상주하는 공간이 있었으며, 오른쪽으로 돌면 문학관 전시실이 펼쳐진다. 거의 10미터가 훨씬 넘는 긴 벽을 따라 신동엽 시인의 일생이 자료 사진과 함께 길게 전시되어 있으며, 벽면의 반대편에는 각종 전시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부여에서 출생하여 부여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5세가 된 시인은 전주 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한 노력 봉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시달리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했어도 독서만큼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후 4년 뒤 공주 사범대학 국문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다시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 치하의 민청 선전부장을 잠시 맡았다가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끌려다니다 병든 몸으로 고향 부여로 돌아왔다.
전쟁 중에는 전시연합대학에서 계속 공부하고 전시연합대학 중 하나인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다.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친구의 소개로 헌책방에서 기거하며 책방 일을 보다가 그해 가을에 후일 아내라 된 인병선을 만난다. 시인이 문학에 뜻을 두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고향 부여로 돌아온 후였다. 가제 야화(野火)로 동인지를 준비하기도 하고 함께 문학적 교류를 즐기던 친구의 집에서 열띤 문학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이후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장시 <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와 한국일보에 평론 <추수기>를 응모하여 조선일보에는 입선하였지만, 한국일보는 최종심에서 탈락한다. 이후 생활 근거지를 서울로 옮겨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을 그리고 세계일보에 <새로 열리는 땅>을 발표하는 등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4․19가 일어나자 월간 교육 평론사에 입사한 시인은 <학생혁명시집>을 출간하고, 여기에 시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를 수록한다.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는 시론 <시인정신론>을 자유문학을 통해 발표한다. 1963년이 되어서 <진달래 산천> 등 발표작 10편과 신작 8편을 수록한 첫 시집 <아사녀>를 출간한다.
이후 시인은 다양한 시작 활동을 이어가면서 <삼월>(현대문학), <초가을>(사상계) 등을 발표하고, 시극 <그 입술에 패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한다. <4월은 갈아엎은 달> <담배연기처럼> 등을 발표하고 이후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다. 그리고 드디어 1967년 37세가 되던 해에 시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껍데기는 가라>가 52인 시집으로 발표된다. 이 시집에는 <원추리>, <그 가을>, <아니오> 등 7편의 시를 수록했으며, 그 해 시인은 팬클럽 작가기금으로 장편 서사시 <금강>을 <한국 현대 시작 전집>에 발표한다.
이듬해 시인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 집필을 계획하고 임진강변을 답사하기도 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한다. 그해 6월 시인 김수영이 타계하자, 그를 추모하는 시 <지맥 속의 분수>를 한국일보에 발표한다. 이후 창작과 비평, 월간문학 등에 <보리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선우휘 씨의 홍두깨> 등의 시와, 대학신문에 시론 <시인․가인․사업가>를 발표한다. 3월에 간암 진단을 받아 세브란스에 입원했다가 한 달 뒤 동선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파주군 금촌의 월롱산 기슭에 묻혔던 시인은 그 후 이십여 년이 지난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 맞은편 부모 산소 아래로 이장되었다.
1975년 <신동엽 전집>이 출간되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판매금지 당했다가 1980년 다시 출간되었다. 1982년 이후 유족과 장작과 비평사(지금의 창비)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많은 훌륭한 작가가 이 기금의 수혜를 받았다.
다른 문학관과는 달리 신동엽 시인의 문학관에 이처럼 시인의 일생을 되짚어 보는 글을 쓴 까닭은 솔직히 문학관 순례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잘 모르고 있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문학관 전시실 가벽에 새겨진 시를 보는 순간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전율이 가슴속에서 일어남을 느꼈다. 특히 시인의 장시는, 산문시를 즐기는 나에게 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고나 할까? 단 몇 편에 불과한 시를 읽었음에도 신동엽이라는 시인에 대해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는 워낙 유명한 시인지라, 다른 시를 한 편 소개하겠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一生)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을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번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고대문화> 196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