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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외출

by 정이흔

오랜만이다. 집이 이사하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아내가 공부하러 나오는 날이면 으레 함께 집을 나섰는데, 이사하고 난 후에는 아내가 전철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혼자 다녔기 때문에 오늘 같은 시내 나들이는 근 다섯 달 만인 듯싶었다. 아내를 목적지에 내려주고 나는 매번 차를 주차하던 곳에 세우고 항상 시간을 보내던 카페로 들어섰다. 여기에 차분히 앉아 글을 쓰다 보면 아내의 공부가 끝나는 시간이 될 것이고, 연락에 오면 다시 아내를 태우고 집으로 가면 오늘의 외출 일과는 끝난다.


일 층에서 커피와 간단한 샌드위치를 주문해서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샌드위치야 먹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래도 조금 긴 시간을 앉아 있으려면 양심상 그 정도는 주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층에 올라 항상 앉던 자리에 노트북을 펼쳤다. 사실 나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공부하는 카공족을 좋게 보지는 않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카공족의 모습일 것을 생각하니 공연히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래서 선입견이 무섭긴 한 것 같다. 노트북을 펴면 무조건 주문은 거의 안 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도 선입견이지 않겠는지.


이곳의 분위기가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실내는 조금 시끄럽다시피 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마 그 영향이 아닐까? 노트북을 편 손님이 몇 좌석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별로 오래 앉아 있지 않고 금방 자리를 비웠다. 혹시 전략적인 것은 아닐까? 손님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도록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 말이다. 시끄러운 음악 때문에 조용히 공부할 장소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삼십 분쯤 지나서는 손님이라고는 중앙의 긴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는 나와, 같은 테이블의 바로 옆 좌석에 앉은 여성 일행만 남았다. 높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그 일행을 옆으로 보면서 아마 한동안은 우리 테이블 이외에 손님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평소의 나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오늘의 할 일은 따로 있었고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주변의 소음이 그다지 방해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옆자리 여성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할 일이란 출판사 투고 메일을 확인하는 일이다. 사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원고를 투고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출판사 이메일 리스트는 그야말로 대학생들의 시험 족보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게 인터넷을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실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더군다나 자기가 투고하려는 원고와 출간 방향이 어울리는 출판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아내를 기다리며 그 작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노트북을 갖고 나왔다.


창밖은 오랜만에 맑은 날씨였다. 이번 주는 낮에 일하면서도 간간이 뿌리는 빗줄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축축한 기분이었는데, 창밖의 햇빛을 보니 마치 어린 시절 슬래브 옥상 빨랫줄에 걸린 채 바짝 말라가던 빨래처럼 뽀송뽀송해지는 것 같았다.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마음도 말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마다 일광 소독을 하듯 말리면 될 것 아닌가? 창밖의 나무는 정말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주 미세한 바람도 없는 것인가? 아까 들어올 때만 해도 조금은 바람이 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지금은 가벼운 나뭇잎조차 자기 몸을 흔들 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따가운 햇볕에 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든 나뭇잎이든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저 한적한 주말 시내 거리를 드문드문 지나는 차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역시 글을 쓰는 사이에 간간이 들어왔던 손님들이 결국 십 분도 못 버티고 나간다. 다른 층으로 간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내가 있는 층은 음량 높은 음악 소리와 옆자리 여성 팀의 대화 소리가 여전히 다른 손님의 안정을 깨트릴 것이고, 그래서 아마 지금 막 들어온 손님도 잠시 후면 자리에서 일어설 것 분명하다. 나는 노트북 하단의 시각 표시를 흘낏 보았다. 지금이 12시 50분이므로 오후 13시 전에는 일어설까? 한 번 나 혼자 내기를 걸어 본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13시가 될 때까지 인터넷 창을 열었다.


결국 내가 이겼다. 아니, 이겼다고 하기에는 좀 뭐 하다. 내가 나에게 이긴 셈인가? 내기를 걸었던 손님이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아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내 시야에서는 사라질 모양이니까, 내가 내기에 이겼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패자 없는 승자이다. 이제 삼십 분도 안 되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나보다 늦게 일어서는 손님이 보기에는 되지도 않은 나이 든 카공족 한 명이 드디어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상습적으로 카페의 좌석을 점유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뭐겠는가? 그냥 노트북을 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일어서면 그만이다.


그제야 꼼짝도 하지 않고 졸고 있던 창밖의 나뭇잎이 이제 일어나서 나오라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에 나간 그 손님처럼 노트북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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