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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by 정이흔

새벽 찬 공기가 훑고 지나간 내 몸은 그제야 걷어찼던 이불속으로 기어든다. 불과 며칠 만의 변화다. 한여름 밤을 식혀 주던 에어컨은 이미 편한 휴식에 접어들었고, 한밤 폭주족의 굉음을 차단하느라 꼭꼭 입을 다물고 있던 창문도 비로소 입을 살짝 열고 가을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인공 바람이 자연 바람에 고개 숙이는 계절이다.



나는 항상 이즈음 날씨가 좋았다. 비록 잠깐 왔다가 가는 날씨이긴 하지만, 한여름 더위를 식히며 가을을 초대하기에는 충분히 적당한 날씨이기 때문이다. 일교차는 심해져도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요즘에 들어 거의 반 팔 상의를 입지 않는 나는 더운 한낮에도 긴소매 상의를 입는다. 덕분에 기온이 치솟는 시간에는 마치 사우나 안에라도 앉아 있는 것처럼 온몸에 땀이 흥건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즐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긴 새로운 취향 중의 하나이다. 어릴 적에는 더위가 싫었다. 한겨울에도 내복을 모르고 지냈던 나에게 오히려 추위는 견딜만했지만, 더위에는 대책이 없었다. 시쳇말로 추우면 끼어 입기라고 하는데, 더우면 더 이상 벗을 것도 없지 않냐고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추위도 타고, 더위도 적당히 견딜 줄 알게 됐다. 계절만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몸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순응해 가는 과정일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한창 눈앞에서 곡예비행을 펼치던 고추잠자리 무리를 요즘은 보기 힘들다.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추잠자리와 길가의 코스모스였는데, 간간이 보이는 고추잠자리보다 더 보기 힘든 것이 코스모스 무리이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것보다 코스모스가 피었던 그 길가는 어디로 갔을까? 단지 내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코스모스를 시야에서 몰아낸 탓이리라. 코스모스가 널려 있던 시골길조차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어 버린 존재가 바로 사람들이다. 시골길도 그런데 하물며 도심지 길가에서는 오죽하겠나. 사람이 코스모스를 몰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앞으로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군락지에나 가야 코스모스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추잠자리도 마찬가지다. 그저 한적한 교외로 나가야 몇 마리 보일 뿐이다.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아마도 그 옛적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곤충 채집 판 위의 고추잠자리만 기억 속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조차 기억에 없는 세대는 동식물도감을 보아야 고추잠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월의 시계는 거침없이 흐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렇게 흐르는 것만이 시계의 사명이고, 그 사명은 아무런 강요 없이도 모든 사람을 복속시키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렇기에 사람은 흔히 말한다.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말이다. 하긴 그 말에 반기를 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각해 보자. 살아서 천수, 만수를 누리기 전에는 생전의 영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연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내가 더위를 견딜 수 있게 된 사연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자, 평범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일 것이다. 자연과 세월은 인간에게 정확히 그만큼의 자유만 보장할 뿐이다.



창밖의 소음이 나에게 쓸데없는 상상만 하게 한다.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자. 먼 옛날 진시황도 그랬고, 영생을 꿈꾸었던 모든 인간도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현세를 떠났다. 그 정도라면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 여전히 사람은 영생을 꿈꾼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야 비로소 헛된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월은 그런 것이다. 하긴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월의 무상함을 신봉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살아가는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지내자는 주의일 뿐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내와 딸과 함께 가끔 들리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술도 한잔 마셨다. 평소 주량의 두 배나 되는 술을 마시니 취기가 오른다. 하지만 그런 취기의 자유를 누리라는 것도 세월이 나에게 준 배려일 것이다. 내일 어떤 삶이 펼쳐지든 간에 오늘 저녁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술을 마실 시간을 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세월이 흐른다는 사실도 무작정 안타까워할 만한 일은 아니다. 나름 적정한 수준에서 나에게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오랜만에 이런 기분을 글로 써 본다. 역시 현실을 관조하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길은 글을 쓰는 방법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내가 세월에 순응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무리한 과욕은 공연히 일상을 피곤하게 만들기만 한다. 그렇게 보면, 어쩌면 세월에 순응하는 길이 현실 도피적 시각인지도 모른다. 하긴 그래도 아무런 상관은 없다.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만으로도 나는 세월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오늘까지도 무사히 살아냈다는 희열과 성취욕을 느끼게 해 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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