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Flight to Denmark 10. 우리 안의 이방인들
마트 한편에 가득 쌓인 바나나를 보면 아버지는 꼭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 덩이를 카트에 조용히 집어넣곤 했다.
그리고는 “이게 말이야 아직도 신기한 게, 내가 제대로 처음 본 바나나가 열세 살 먹어서 본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총 천연색 영화에서 거든. 아랍 왕실의 연회에 온갖 이국적인 과일이 놓여 있는데, 거기에 샛노란 바나나가 쌓여 있는 거야. 그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몸이 붕붕 뜨고, 아주 그냥 신기한 아랍 여행을 갔다 온 것처럼 모든 게 너무나 멋졌어.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영어 책에서만 보던 이 바나나를 한 번 맛보는 게 더 소원이 됐는데, 나중에 흔치 않게 바나나를 파는 곳이 생겼어도 이게 비싸도 어찌나 비싼 지, 일반 사람들은 구경 도 못할 정도였단 말이지. 그런데 아빠 중학교 3학년 때, 강필성이라는 친구네 집에 가서 그 어머니한테 이 귀한 바나나를 대접받은 거야. 그런데 실제로 바나나를 먹어보니 웬걸! 상상보다 더 신기한 맛이 나는 거지. 그렇게 귀하던 과일이 지금은 여기에 이렇게 쌓여 있고 우리가 장바구니에 넣을 수 있으니 안 신기 할 일이니? 진짜 격세지감이지.”
“아빠는 그 오래전 친구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나?”
“그럼 팔달 문 옆 동네로 들어가서는 제일 좋은 이층 양옥집은 그 집뿐이었는데! 아빠는 다 기억이 나. 그때 밝은 연분홍빛 한복을 입은 그 집 어머니가 은쟁반에 바나나 하고 사과를 가져 나와 깎아 주셨어. 아빠는 그날이 또렷이 기억이 다 나.”
그 말을 하는 아빠의 눈이 한때 소년처럼 빛나는 것 같았었다.
어릴 적 내가 열이 나고 아프면 퇴근하는 아버지손에 바나나 한송이가 들려 있었는데, 아버지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해도 여전히 싸지만은 않은 과일이어서, 큰 맘먹고 엄마가 사 온 나폴레옹 제과의 찹쌀떡과 함께 내게 주어지는 특별 선물로 달달한 병상 호사가 되었다.
이마가 팔팔 끓는 와중에도 일어나 앉아 조금씩 베어 물었던 아련한 추억의 바나나가 나 역시 아직 좋은 이유는 그래서일까? 나중에는 바나나뿐일까! 온갖 이국적 과일과 채소들이 식탁에 흔하게 올라오는 것에 여러 감상이 드는 두 사람, 넘치게 과년한 딸과 아버지는 이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화두로 그렇게 두런두런 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내가 이곳에서 일하기 전, 순두부 가게를 열심히 탐색했다 해도 내가 놓친 부분이 많았구나 생각한 것은 소박한 우리 음식을 파는 백구네 순두부는 사실 지금 식탁 위의 다채로움 못지않게 꽤나 이국적인 곳이었다는 것이다.
홀서빙 담당은 물론, 요리를 담당하는 주방팀까지 내국인이 못 미치는 일손을 대신해 동분서주하는 외국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특히나 주방장 테무르 아저씨는 우리네 생김새와 영락없는 몽골계 특성 때문인지 그냥 놓고 보면 매양 한국인 같아 더 그랬다.
중년의 그는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울란바토르의 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지만 지금은 아내와 함께 일하며 이곳에서 매일 제대로 된 순두부찌개를 무수히 끓여 내고 있는 베테랑이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유창한 한국어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낯선 타국의 미각을 완벽히 섭렵한 이 이방인의 총명함은 그의 음식을 접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를 감탄하게 했다.
그리고 테무르 아저씨의 주방보조 무비나. 그녀는 칠흑처럼 검은 머리에 동서양의 이목구비가 절묘하게 조화로운 전형적인 우즈베크 미인인데 그런 그녀의 얼굴에 흠이 있다면 항상 깊은 수심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중국의 절세 미녀 서시처럼, 항상 미간을 찌푸려 그것이 굳어질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여려 남들에게 얘기할 땐 애써 웃어 보이려고 노력을 하는 착한 사람이라서 나는 시름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더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결국 그 이유가 그녀의 미모를 담아내지 못하는 의처증이 있는 못난 남편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게 누구보다 이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쯔엉. 그녀는 이곳에서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일 순위 친구다. 작고 여리여리하며 어린 학생이지만 누구보다 다부진 그녀는 보기보다 싹싹해서 오히려 언니처럼 새로 들어온 나를 챙겼다. 쯔엉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시 시작하는 일의 첫 단추를 쉽게 끼워 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수박을 키우는 베트남 시골 농가의 여덟이나 되는 형제자매 중 둘째라고 했다. 위로 오빠가 있고 유일한 남자 형제인 오빠를 빼고는 모두가 딸인 딸부자 집의 자매 중 장녀라고 한다. 역시 장녀의 위엄은 어딜 가나 발휘되는 것인지, 이제 대학생인 그녀와 나는 나이차이를 넘어 마음을 나누는 친구사이가 되었고, 오히려 내가 그녀의 성숙함에 삶의 자세를 배워가는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이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하노이시에 위치한 명문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마음 넓은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겸손해했다. 쯔엉만큼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오빠가 스스로 동생의 진학을 기쁜 마음으로 응원하며 지금 고향에 남아 아버지를 돕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란다. 그런 그녀는 도심의 대학에 와서도 진가를 발휘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한국 대학으로 유학을 올 수 있었다고 하니, 흡사 우리의 옛날 신문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보던 수재이야기와 같지 않은가.
그런 그녀가 한국에 와 놀란 것은 자신의 부모와 비슷한 나이 대의 한국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엄마, 아빠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노이에 올라와서도 햇빛에 그을리고 농사 일로 찌든 자신의 부모가 도심의 사람들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을 알았지만, 서울에서 부모 나이 뻘 되는 사람을 보면서는 그 이상의 대비를 받아 가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더욱, 마른 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의 처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거친 손 끝은 갈라져 피가 나고 허리가 굽어져 가는 어머니 등은 심각한데 그렇게 뼈 빠지게 노동하여 버는 수입은 여덟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기에 늘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오빠가 옆에서 돕고 있다고 한들 그가 부모와 같은 생의 전철을 밟는 듯 보여,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오빠를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잠시 학업을 접고 일 년은 이곳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계속 학교에 보내야 하는 아직 어린 동생들과 돌아가는 집안사정을 보아하니 자신은 공부만 하겠다는 자세로 모른 체할 수 없어, 부득이하게 잠시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참이라 했다. 빨리 졸업을 하고 베트남에 돌아가 한국의 대기업에 취직해 돈을 버는 것이 더 낳을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당장의 집안 사정이 너무 힘들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 인생 중 어느 때보다 조급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크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씩씩하고 밝은 쯔엉이었다. 이 친구가 터 놓은 이야기가 내심 대단하고 대견스러워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내가 일로써나마 그녀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다른 일을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녀가 남은 학기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하면서 숙식 비용을 아끼게 해 주면 어떨까 해, 그렇게 쯔엉은 그렇게 말 그대로 나와 한 식구가 되었다.
글 반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