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눕다 #6

<인생의 역사> 중 / 신형철 : 보이지 않는 너의 사랑은

by Soopsum숲섬


몇 해 전 카페에서 일할 때 창고 정리를 하다가 구석에 보관 중인 우산 무더기를 발견했다.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보이는 우산과 손님들이 놓고 갔을 법한 비닐우산 몇 개를 눈여겨봐 두었다.

어느 오후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다. 카페를 나가는 손님 중 누가 우산이 없나 챙겨보며 일했다. 혼자 남은 손님이던 여자분이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길래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우산이 없다고 하신다. 잠시만요, 하고 들어가 남색 우산 하나를 가지고 나와 그분께 드렸다. 처음엔 받아도 되냐고 물으시더니 곧 활짝 웃으며 좋아하셨다. 서울이 집이라고 하시며, 그런데 우산을 정말 줘도 되냐고 또 물어보신다. 그래서 답했다.


"예전에, 비가 많이 와서 비를 맞으며 가고 있었는데요. 어떤 우산 쓴 분이 다가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저보고 쓰라고 주더라고요. 그날 무척 추웠는데 고맙게 받은 적이 있어요. 혹시 나중에 갑자기 비 올 때가 있거든, 이 우산을 꼭 다른 우산 없는 분께 전해주세요."라고.


지금도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았던 그 우산이 전국을 여행하고 있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우산은 어쩌면 비행기나 배를 타고 세계를 여행 중인지도 모른다. 비를 맞는 누군가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마음이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곧 만날 사람을 생각하며 맛있는 빵을 사는 마음, 길 잃은 새끼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 좋아하는 사람 쪽으로 저절로 기울어지는 마음, 사랑하는 당신의 말과 몸짓을 온몸으로 들으려는 마음, 모두 무엇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나 그런 일'이다. 사랑이 대체 뭘까를 생각해 보다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이 사전적 정의 그대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어 보이지 않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혹은 너무 딱딱하거나 무거울 수 있는 것 같다. 고대인들이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라고 믿었던 4원소 물, 불, 흙과 공기 중 내가 생각해본 사랑과 가장 흡사한 형태를 지닌 원소는 바로 '물'이다.


어쩌면 당신의 사랑은 한 방울의 물이다. 그 물은 지속적인 마음이나 행동으로 점점 커지고 무거워지다 결국 무언가를 적시기도 하고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열사나 테레사 수녀님처럼 타자와의 경계 없이 세상 모두를 나처럼 생각하는 이들의 사랑은 호수나 바다처럼 크고 깊은 물이다. 작은 물방울들은 결국 그리로 흘러든다. 바다는 수천수억 개의 물방울들의 어울림이기도 하고, 가장 큰 한 개의 물방울이기도 하다. 상처 입은 마음에 사랑은 얼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물이 얼어버리면 그 순간 물이 품고 있던 어떤 것(자의든 타의든 내 곁에 있던 것, 예를 들어 물 위로 떨어진 나뭇잎이나 누군가 던진 돌, 날카로운 칼자국이나 물결)마저 함께 고정된 채로 얼어버리게 된다. 아무리 눈을 돌려도 그것들은 내 곁에 혹은 내 안에서 나를 찌르거나 불편하게 한다. 아늑해져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봄이 온 듯 녹아버리기 전까지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당신이 지금 춥다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하거나 남쪽 나라에 이미 살고 있다고 상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작가가 제안한 아름다운 방식을 빌어서). 그때의 사랑이란 딱딱하고 무겁고 춥고 불편한 거대한 얼음덩이 같은 형상이 아닐까. 반면 사랑이 존재하기 힘든 곳, 무덥고 무자비한 사막과 같은 환경에서 물은 형태를 잃고 공중으로 흩어진다. 희미한 수증기나 구름, 안개비로 존재할지라도 그 존재 또한 물이듯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순간에도, 무자비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희미한 수증기 같은 사랑의 씨앗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증기나 얼음 또한 물에서 태어났듯이 다양한 모습을 가졌어도 사랑은 언제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당신이 사랑이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바로 사랑이다. 아무리 외부에서 사랑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도 사랑은 흩어지고 변해가고 삶은 공허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난 왜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이렇게 내 안에 사랑이 있고 사랑할수록 커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두려울 게 없었을 텐데. 왜 내가 작고 약하다고만 믿으며 살아왔을까. 내 존재가 사랑이라면 난 더할 나위 없이 강한 존재다. 나는 흩어지고 깨질 수 있고, 육체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 이 사랑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쉽게 이기적이 되어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우리'를 만들고 유지해간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런 실수를 쉽게 저지르곤 한다(정치에서 내 편이 아닌 자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열렬히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와 너의 경계가 건강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이런 마음으로 존재하는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고,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세상의 물방울들은 하나의 바다가 되어 모든 물을 받아들이고 온갖 더러움을 정화하고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완전체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들 각자마다 사랑의 정의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역사가 다른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의 사랑이 커다란 하나의 사랑이기도 한 이유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Amo: Volo ut sis.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 <인생의 역사> 신형철, 난다 (2022) 96쪽.



* 덧 : 내 사랑은 불인데, 공기인데, 다른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오랜 시간 얼음이었고 한때 수증기였던 내가 경험한 사랑에 대한 글이고, 각자의 사랑은 각자의 짙고 옅은 오만가지 색깔이거나 무색무취의 투명한 공기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고, 당신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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