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에게

이야기

by 정민쓰




※이번 단편은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감상에 유의하여 주십시오.












안녕 Y. 나야.

잘 지내고 있는지는 묻지 않을게. 내가 너에게 근황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음.... 우선... 미안해.




우린 꽤 친한 친구사이였잖아. 그렇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너에게 미안한 마음도 크지만, 정말 솔직히 마음 한편에는 내가 그렇게 잘 못했나 싶은 생각도 함께 들기는 해. 아니. 그렇잖아. 초등학생들이 싸우는 것만 보더라도 막상 각자한테 얘기를 들어보면, 걔네들도 각자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다툰 거잖아? 우리라고 한 쪽만 일방적으로 잘 못 했고, 일방적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난 그것도 어폐가 있다고 봐. 원래 추억은 다르게 적히는 법이랬으니까.




..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말하다 보니 울컥했다. 미안. 내가 늘 이래. 알잖아.




나 오늘 네 여자친구를 만났어. 아니 전 여자친구라고 해야겠지. 내 앞에서 한참을 울더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 너를 못 잊었나 봐. 네가 했던 말들 있잖아. 감정은 전이된다고. 정말 그 말이 맞더라. 내 눈앞에서 걔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데 나도 괜히 덩달아 슬퍼지더라고. 지금 할 얘기는 아니지만 네 여자친구, 아니 전 여자친구. 예쁘긴 진짜 예쁘더라. 아니 뭐. 어쨌든 슬픔은 함께 하면 반이 된다잖아? 그래서 같이 슬퍼해줬어.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무 일 없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만나던 사람인데. 그렇지?









사실 너에게 미안함을 논하자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 대충 초등학생 때부터로 하자. 그때 너네 집에 자주 놀러 갔었잖아. 너희 부모님 참 좋으신 분들이었는데. 그렇지? 너희 부모님께서 나를 엄청 예뻐해 주셨지. 난 솔직히 너희 부모님이 내 부모님이었으면 했었어.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으시고 매일 싸우지도 않으셨잖아. 게다가 돈도 잘 버시고. 난 너희 집처럼 그렇게 넓은 집은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어.




기억나? 난 체구도 작고 성격도 소심했잖아. 그놈의 빠른 년생인지 뭔지는 누가 만든 걸까? 당연히 한 살 일찍 학교에 입학한 건데 체구가 작을 수도 있는 거잖아? 반 애들은 키 큰 너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나한테는 그렇게 못 살게 굴었었지. 내가 제일 힘들었던 건 이유없이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가난뱅이라는 말을 들을 때였어. 넌 애들이 날 괴롭힐 때마다 날 지켜줬었지. 참 고마웠어. 한 때는.


그런 네가 처음엔 이해가 안 가기도 했지. 너는 집도 잘 살고 덩치도 좋고, 교우관계도 좋으면서 왜 항상 나와 함께 등하교를 했을까. 왜 항상 내 옆에 있으면서 날 괴롭히는 애들한테서 날 지켜주었을까?




사실 난 다 아는데 모르는 척했었어. 넌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게 기분 좋았었던 거지? 가난뱅이에 비렁뱅이 부모를 가진 내가 너하고 비교되는 게 좋았던 거잖아? 키도 겨우 네 어깨정도인 데다가 말이야.


너희 집에 갔을 때마다 그렇게 많은 반찬을 신나서 게걸스럽게 먹던 내가 우스웠었지? 네 방에 비싼 게임기를 보면서 내가 입이 떡 벌어지는 걸 보면서 네가 분명 비웃었었어. 내가 좀만 대범했어도 그때 너한테 주먹 한 번이라도 내질렀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내가 너한테 미안했던 건, 여름즈음에 내가 너희 집 놀러 갔을 때 네가 게임기가 갑자기 없어졌다고 멋쩍어했잖아. 그거 사실 내가 훔쳤었어. 어린 마음에 문득 너를 골려주고 싶어서 가방에 담아 갔는데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버렸지. 근데 집에서 엄마가 게임기를 보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훔쳐놓고 써보지도 못했어. 어쨌든 그게 내가 너한테 미안했던 기억 중 하나야.










우린 다른 중학교를 가게 됐었지. 네 소식은 다른 중학교인 나한테도 종종 들려왔어. 뭐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면서. 생각해 보니 아직도 궁금한 게 있어. 대체 왜 다른 중학교를 갔으면서도 우리 집에 자주 전화해서 나를 찾아댄 거야? 주말이면 같이 놀자고 불러댔잖아. 그리고 종종 우리 집에 반찬 싸가지고 왔던 것도 그래. 우리 엄마는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나보다도 너를 사랑하신 거지. 네가 바라던 대로 돼서 기분 좋았었겠다?




중학교 가서도 그렇게 잘 나가게 되니까 나 같은 애를 데리고 다니면 네가 훨씬 더 돋보인다고 생각한 거겠지? 네 중학교 친구들을 나한테 소개해줬을 때 애들이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잊을 수가 없어. 끼리끼리 논다고, 걔네들도 너랑 하나같이 똑같은 애들이더라. 나한테 어깨동무를 하고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엄청 친한 척하길래 나도 적당히 맞춰줘야 했어.




지금이야 다 커서 모든 게 기만이었다는 걸 알지만, 사실 그때는 당황해서 너를 포함한 그 무리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어. 근데 그중에서 특히 나한테 잘해줬던 여자애 기억나? 분명 나한테 마음이 있던 거야. 나만 보면 싱글싱글 웃더라니까. 나 솔직히 걔 좋아했었어. 걔한테 틈만 나면 자주 전화도 걸었고, 거의 매일마다 걔네 집 근처에서 몇 시간이고 그 애가 오는 걸 기다렸었지. 근데 언젠가부터 걔가 날 좀 피하는 것 같더라고. 그러다가 심지어는 제발 이제 그만 연락했으면 좋겠대.




야. 진짜 이런 친구가 어딨냐? 난 네 생각해서 혹여나 걔가 너랑 같은 학교 친구니까 네가 그 여자애랑 사이가 난처해질 걸 걱정했어. 그래서 솔직히 그 여자애한테 나 가지고 장난친 거냐고 화낼라다가 참았거든? 근데 알고 보니 그 여자애랑 너랑 사귀는 사이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억장이 무너지더라. 진짜 기분 더러웠는데 너한텐 티 안낸 거 모르지?




봐봐. 나만 너한테 일방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할 저기가 아니라니까? 아니 뭐 어쨌든 그래서 내가 여기서 미안한 거는 그때 그 여자애가 너한테 선물로 줬다는 열쇠고리 있잖아. 네가 가방에 맨날 달고 다니던 거. 그거 갑자기 없어진 거, 사실 내가 그랬어. 네가 자리 비웠을 때 몰래 버렸거든. 그러고 얼마 안 있어서 너랑 그 여자애랑 헤어졌잖아. 솔직히 기분 좋았는데 내심 미안하기도 했어. 네가 그렇게 속상해할 줄은 몰랐지. 근데 사실 네가 날 배신한게 먼저잖아. 뭐.. 그래도 미안하긴 미안했어.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우리가 다시 같은 반이 되었을 때 넌 너무 기뻐했지. 당연히 기뻤을 거야. 데리고 다니면서 너의 우월감을 채워줄 사람이 늘 같은 공간에 있게 되었으니. 그 당시에 너의 교과서를 몰래 숨겼던 건 정확히 세 번이었어. 미안해. 그래도 그건 내 나름대로 너무 티가 날까 봐 많이 하진 못했어. 근데 그땐 아직 네가 날 배신했던 배신감이 더 컸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거 말고도 네 체육복에 볼펜 잉크를 꽤 많이 묻혀서 더럽힌 적도 있는데 이건 솔직히 그렇게 미안할 일 정도는 아니잖아? 사소하니까. 물론 그래도.. 미안해.




그리고 이실직고하는 김에, 내가 제일 열받았던 건 내가 마음에 들었던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다 너를 좋아했다는 거야. 네가 쾌활한 척 온갖 가식을 떨면서 걔네들한테 작업 걸어대던 거 다 알아. 네 생일 때 여자애들이 준 선물들 몇 개는 사실 내가 몰래 슬쩍했었어.




아 맞다. 그리고 너도 나한테 사과해야 돼. 이 이야기는 아마 너는 모를 거야. 내 나름대로 너한테 화내기 싫어서 말 안 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때 어떤 여자애가 나한테 편지랑 선물상자를 주더라고. 나더러 너한테 전해줄 수 있냐더라. 하. 씨팔 진짜. 날 수하처럼 데리고 다니던 네 계획이 결국 성공한 거지. 다른 애들도 날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전달해 주랜다. 나더러 너한테. 너무 화가 나서 그 여자애가 줬던 것들은 아무도 안 볼 때 그냥 쓰레기통에 다 처박아버렸어. 솔직히.. 이 일도 내가 미안해해야 할 일인가 싶긴 하네.









사실 다 지난 얘기들이긴 하지. 내가 아무리 미안해해 봤자. 그렇지? 학창 시절 이야기들이야 벌써 십 년도 넘게 지난 이야기잖아? 그래도 이렇게 고해성사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내 성격 알잖아. 미련할 정도로 착해빠진 거.




우리 지난주에 만났을 때 있잖아. 아 잠깐만. 네 여자친구한테 문자 왔다. 내 정신 좀 봐. 지금은 전 여자친구지. 어쨌든 얘가 자꾸 네 소식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자꾸 난리야. 얘 마저 나를 네 부하정도로 생각하나 봐. 내가 진짜 양반이라서 참는 거지. 넌 진짜 친구 잘 만난 줄 알아라. 아.. 뭐.. 그건 아닌가.




아. 생각난 김에 말하는 건데, 그동안 네가 여자친구 생길 때마다 꼭 나한테 소개해주던 거 생각해 보면 넌 진짜 악질이구나 싶다. 그렇게 매번 꼭 나를 비참하게 조롱해야만 했냐? 계산도 꼭 네가 하고. 내가 거지새끼인 것 마냥 홍보하고 싶어서. 그렇지? 하긴 그때마다 고분고분 나가서 분위기 맞추던 나도 병신이지.




그나저나 진짜 네 전 여자친구 진짜 예쁘긴 엄청 예쁘더라고. 네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항상 이런 여자들만 만나왔는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문득 난 네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려고 내가 만났어야 될 여자들을 네가 가로챈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어. 거의 기정사실이지만.




어쨌든 나도 이제는 너처럼 내 마음대로 해보려고. 네 전여자친구가 자꾸 문자로 네 얘기해 달라고 보채잖아. 너에 대해 뭐라도 알고 있으면 제발 말해달래. 내가 진짜 네 따까리 정돈 줄 아나? 그래서 나도 다음에 만나자고 해서 네 이야기 핑계로 술자리 해보자고 하려고. 걔 술 잘 못한다며. 사실 원래는 내 여자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애니까, 너한텐 좀 미안하긴 해도 잘 못된 건 아니라고 봐. 그렇지?










아 이야기가 잠깐 다른 길로 샜네. 너랑 나랑 지난주에 내 자취방에서 만났을 때 있잖아. 사실은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그 일 때문이지. 정말 미안했어. 물론 네가 먼저 잘못한 거지만. 단 둘이서 술 마신건 오랜만이었지. 그날 우리 둘 다 유독 많이 마셨는지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아. 특히 네가. 네가 나한테 그랬지.


'난 너 원망 안 한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네가 저 말을 했을 때는 정말 이성을 붙잡기 어려웠어. 내 뒤집어지는 속도 모르고 너는 계속 그 주둥이를 나불댔잖아. 너 다 알고 있었다며? 어렸을 때 게임기도, 교과서도, 체육복도, 열쇠고리도,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일들. 그 얘기를 듣고 대체 누가 열받지 않을 수 있겠어. 솔직히 그 누구라도 그랬을 걸? 넌 날 머리 꼭대기 위에서 네 마음대로 주무르고 가지고 놀고 있던 거야. 그 좆같은 우월감과 선민의식을 느끼면서.




그때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잠깐 의식이 끊긴 것 같아. 정신을 차렸을 때, 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 거 봐. 난 널 그렇게 언제든 이길 수 있었는데.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착했기 때문에 모진 수모들을 참아왔단 게 증명된 거지. 근데 통쾌할 줄 알았는데 너무 공허하고 텅 빈 기분이더라. 난 그날 밤을 꼴딱 새웠어. 새벽에 쓰레기차가 너를 담아가는 걸 본 후에서야 긴장이 풀려서 잠이 오더라. 꿈속에서도 난 너한테 사과했었어. '미안해.'라고.










네가 없으니까 한 주 동안 나한테 연락 오는 사람이 없어졌어. 네 전 여자친구, 아니 네 여자친구였던 그 여자가 찡찡거리는 거 빼고. 자꾸 너한테 연락같은 거 오면 꼭 알려달래. 하. 진짜 씨팔 기분 뭐 같네.



진짜 더럽다 기분. 왜 이렇게 뭔가 공허하지? 그래도 지금 내가 용기 내서 이렇게 너한테 사과했잖아? 확실히 전보다는 홀가분하긴 하다. 용서받는 기분이야.





Y야. 다시 한번 미안해.

근데 너도 잘 못 한 거 알지?

어쨌든 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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