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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식 Jan 12. 2022

삼손과 예수

나는 어렸을 적에 본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 때문인지, 삼손이 이방 여자를 두 번이나 사랑해서 그런지  삼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삼손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손을 믿음의 모범으로 해석하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사기 저자는 14장에서 16장에 이르는 긴 본문을 할애해서 삼손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15장 20절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라는 표현으로 일단락되는 듯한 삼손 이야기는 다시 16장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리고는 16장 31절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로 다시 맺는다.


사사기 14장에서 16장까지의 내용 중에 삼손이 잘못한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나실인으로 살았는데 술을 마셨다는 내용도 없다. 그는 나실인의 규례를 잘 지킨 것이다.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는 것이 잘못처럼 보이지만 14장 4절에,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는데는 거룩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를 친구에게 준 처가 식구들에 대한 응징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삼손이 들릴라에게 자신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괴로워서 말한 것이 유혹에 넘어간 실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들릴라가 은 천 개에 삼손을 팔아넘긴 사건이다. 삼손은 들릴라가 자신을 꾀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려는 것을 몰랐을까? 본문의 흐름 상 삼손은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들릴라를 저주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끌려가 눈이 뽑히고 온갖 희롱을 받으며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았다.


이러한 삼손의 모습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것이 무리일까? 은 삼십에 자신을 팔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까지 입맞춤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나에게는 오버랩된다. 삼손은 자신이 끌려가고 죽임을 당할 것만 안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죽으면서 죽일 블레셋 방백들과 사람들의 수가 그가 살아있을 때 죽인 수보다 더 많을 것을 알았을 것이다. 16장 28절에 나오는 삼손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삼손은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혀 집을 무너뜨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혹은 예표로 언급되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여호수아 등과 같은 믿음의 위인들에게도 실수와 죄가 있다. 나는 삼손의 죄가 다윗의 죄보다 크다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삼손은 나실인으로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당한 치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비견될 만하다. 더 나아가 그가 죽음으로 이룬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충분히 예표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삼손을 힘은 셌지만 여자에게 한 없이 약해 유혹에 넘어간 문제아로 취급하면 안 된다. 그는 살아서도 그리고 죽음으로써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믿음의 용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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