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흔들리는 계단
8월 12일, 금요일. 파일명을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 mote.bak
확장자는 백업 파일의 형식이지만, 문제는 그 이름이다. mote. 먼지, 티끌. 시스템이 자동으로 생성했다기엔 너무 상징적이고, 내가 만들었다기엔 기억이 없다. 생성일시는 오늘 아침 7시 19분. 딱 그 시간,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그 경계에서, 딸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
“아빠, 그거 누르면 나 진짜 사라져.”
그 말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커서를 `mote.bak` 위에 올리는 순간, 툴팁이 떴다.
“삭제된 기억 복원 가능 (임시 버전)”
심장이 두어 박자 빠르게 뛰었다. 클릭하려다 말고, 마우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도대체 이건 뭐지. 왜 이 타이밍에, 왜 이런 이름으로, 왜 나에게.
나는 잠시 파일 속성을 확인했다. 사용자 권한은 ‘로컬 관리자’, 접근 로그는 비어 있었다. 누가 이걸 만들었는지, 언제 접근했는지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심지어 보안 로그도 비활성화 상태였다. 누군가 고의로 흔적을 지운 것처럼.
다시 커서를 올려 클릭했다.
화면이 순간적으로 깜빡이더니, 커다란 검은 배경이 펼쳐졌다. 그 위에 하얀 텍스트가 하나씩 타자기처럼 찍혀 나왔다.
> clearMemory();
// 메모리 초기화
> loadPreviousInstance("local/user");
// 이전 인스턴스 호출: 로칼 사용자
> flagGhost("user");
// 사용자 잔류 의식(user.ghost) 플래그됨
> launchBackup("mote.bak");
// 티끌 백업 이미지 실행 중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하나의 창이 떴다. 작은 영상. 해상도가 낮고, 노이즈가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초점이 맞춰지며,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하연의 방, 그녀의 책상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핑크빛 진열대. 그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있었고, 그녀는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화면에는 소리가 없었지만, 그녀의 손짓, 필기 속도, 숨결이 화면 너머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화면이 멈췄다. 고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막처럼 글자가 떠올랐다.
“이건 네가 만들어야 해. 그래야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에 대고 속삭였다. “누가?”
그러자 다시 자막.
“티끌은 기억이 아니야. 남겨진 의지야.”
순간, 커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손은 마우스에 닿아 있지 않았는데.
`Yes` / `No`라는 선택지가 뜨고, 커서가 `Yes` 위에서 잠시 멈췄다가 이탈했다.
나는 당황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때, 파일 실행 창이 꺼지고 모든 화면이 닫혔다. 바탕화면으로 돌아왔고, `mote.bak`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폴더를 열고, 시스템 임시 파일, 실행 캐시, 휴지통까지 다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파일은 증발해버린 듯이 사라졌다.
그때, 오른쪽 하단에 알림이 떴다.
“mote.bak이 시스템 롤백 트리거를 일으켰습니다.”
“일부 사용자 로그가 복구되었습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한 문장씩 읽어내려갔다.
그 다음 문장.
“ghost.user=조태호”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다시 화면을 봤을 때, 마우스 커서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 손이 아닌, 그 무엇이 내 화면 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은 바탕화면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면은 정상이었지만 내 눈이 그것을 해석하지 못했다. 한순간 시신경이 혼란을 겪은 것처럼, 도형이 도형이 아니고, 글자가 글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야, 다시 아이콘이 제 위치에 있는 게 보였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mote.bak`은 사라졌고, 검색에도, 레지스트리 추적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회사 메일이었다. 발신자명은 익숙하지 않았다.
no-reply@entangled.sys
내용은 단 한 문장.
> blockMemoryAccess(); // 메모리 접근 차단
"You are not supposed to remember this."
당신은 이것을 기억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즉시 브라우저를 닫았다. 단축키로 캐시를 비우고, 연결을 끊고, 백신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과정이 진짜 해킹이 아닌, 내 안에서 발생한 반응인 것처럼. 가짜 자극에 진짜를 갖다 대는 기분이었다.
목덜미가 저릿하게 일렁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평온했고, 회색빛 건물들은 여전히 움직임 없었다. 하지만, 그 고요가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조용한 것이다. 에어컨 소음조차 멈춘 듯한 정적. 나는 고개를 돌려 서버실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인디케이터 불빛이 깜빡이는 걸 보니, 전원은 살아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연후’라는 이름이 떴다.
“어, 연후야.”
“태호야, 너 혹시 오늘 아침에… 뭔가 이상한 꿈 꿨냐?”
나는 대답을 멈췄다. 이건 평범한 인사도, 일상적인 농담도 아니었다. 연후는 그런 말을 툭 던질 사람이 아니다.
“…왜? 너도?”
그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니, 괜찮습니다. 별일은 아니고. 그냥… 오늘 좀 이상해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되물었다.
“혹시,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어? 꿈에서.”
연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어떤 애가 내 이름을 불렀어. 난 걔를 모르는데, 걔는 나를 아는 눈치였어. 그리고… 그 애가 울었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묻더라고.”
순간,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등을 떼고 몸을 숙였다.
“너, 혹시 그 애가… 여자애였어? 머리는 좀 길고, 말투는… 반말?”
“…어떻게 알았냐, 그걸.”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는 순간 무언가가 깨져버릴 것 같았다.
딸.
내가 꿈에서 들은 목소리.
“그거 누르면 나 진짜 사라져.”
그리고 방금 전, `mote.bak`을 실행한 직후의 변화.
그 순간, 컴퓨터 화면이 깜빡이며 다시 한번 바탕화면이 흩어졌다. 단 몇 프레임 정도였지만, 나는 확실히 봤다. 내 사진이 아닌, 누군가 낯선 사람의 프로필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을. 곧이어 이메일 하나가 자동으로 열렸다.
발신자: lee.hana@domain.deleted
제목은 없었고, 본문에는 단 한 문장이 있을 뿐이었다.
> authorizeStart(); // 시작허가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화면을 닫았다. 이건 시작이 아니다.
이미 한 번 끝난 세계가, 다시 돌아오는 중이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도, 눈도, 숨결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머릿속 어딘가에서 귓가를 울리는 낮은 진동음 같은 게 계속 울렸다. 바탕화면은 평온했고, 모니터는 어김없이 회사 로고를 띄운 대기 화면으로 전환됐다. 시간이 흘렀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메일. lee.hana@domain.deleted
나는 그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도메인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주소였다. 메일 헤더도 비어 있었고, IP 추적도 되지 않았다. 보낸 흔적조차 없이 도착한 메일. 그것은 정보라기보다, 메시지라기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 증명’ 같았다.
나는 조용히 모니터를 껐다. 스탠바이 불빛만 남은 화면 앞에서 숨을 고르고, 일어섰다. 천천히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월요일 오전, 보통은 팀원들이 하나둘 도착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커피 냄새가 퍼지기 시작할 시간이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홀 앞에 서자 마침 문이 열렸다. 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벽면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아주 짧은 시간 왜곡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 버튼을 누르며, 벽면 스크린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짧은 구간의 전력 리플렉션 현상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고에너지 입자 간섭 가능성에 대해 분석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나는 이 뉴스가 생뚱맞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드디어 바깥에도 무언가가 흔들리기 시작했구나. 이제 이 현상을 아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위안 같은 감정.
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무너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 로비. 익숙한 조명이었고, 리셉션 직원은 늘 그렇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나는 몇 걸음 걷다 멈췄다. 복도 한쪽 벽면에 설치된 디지털 시계의 무엇인가가 내 시선을 낚아챘다.
8월 12일 (월) / 오전 09:42
정작 문제는 날짜가 아니었다. 그 밑에 흐르던 자막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회사의 모토, “기억은 데이터를 남긴다” 대신, 다른 문장이 짧게 지나가고 있었다.
> moteProcess("restore"); // 티끌 진행, 복원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회사 장비가 아니야…”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건 우리 시스템에선 나올 수 없는 문구다. 저건 시스템 백업 절차에 사용되는 문장이 아니라, 무언가를 되돌리는 명령이 완료됐다는 로그였다. 그 순간, 오른쪽 귀에서 다시 속삭임이 들렸다.
“…지금은 아직, 기억만 남아 있어.”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디지털 시계를 보자, 방금 전 자막이 사라지고 원래 문구로 돌아와 있었다.
“기억은 데이터를 남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듯했다. 리셉션 직원은 여전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로비에 들어오는 직원들 역시 늘 그렇듯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이 세계는 이전의 그것과 완전히 같지 않다는 것을. 나는 핸드폰을 꺼냈고 다시 연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두 번 울리고, 연결음이 바뀌었다.
“현재 고객의 전화기는 꺼져있거나…”
무언가 잘못됐다. 연후는 내내 깨져 있던 연결선처럼, 아주 잠깐 통화로 이어졌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로그아웃된 느낌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그때, 잠금 화면 위로 알림이 떴다.
[시스템 경고]
> user: jo.taeho
> mote 상태: 활성화 / 복원 대기
> 잠재적 충돌 감지: 1
마치 이 모든 게, 내가 원해서 되돌아온 것처럼 휴대폰 화면 위에 떠 있는 알림을 나는 끝까지 지우지 않았다.
“mote 상태: 활성화 / 복원 대기”
그 아래, “잠재적 충돌 감지: 1”
숫자 1.
그것은 대상이 하나뿐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지금 이 충돌이 오직 나 하나와 관련된 일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은 짧았지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벽면 스크린은 검게 꺼져 있었고, 로비를 지나칠 때 들리던 BGM은 중간에 끊겨 있었으며, 복도의 조명은 분명 자동인데도 내가 지나갈 때마다 미세하게 점멸했다. 이건 전력 이상이 아니었다. 내 감각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포렌식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자리에 앉아 있는 팀원이 한 명 보였다.
“어, 조태호 씨. 좀 일찍 오셨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범했고, 표정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는 이 공간에 없었다. 방금까지는. 아니, 더 정확히는—
그는 원래 여기에 없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시스템을 켰다.
백업 서버에 접속하고, 하연의 SD카드에서 추출한 로그 데이터를 다시 불러왔다. 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구조가, 오늘 새로 생성된 디렉터리 하나와 함께 나타나 있었다.
폴더명: /mote/cache/083c29/
생성일시: 2025년 8월 12일 09:43
생성자: unknown
안에는 단 하나의 `.md` 파일.
파일명을 본 순간, 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더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믿을 수 없게 된 시점이었다. 파일을 열었다. 텍스트 에디터가 로딩되면서, 몇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 setUser("jo.taeho"); // 현재 사용자 설정: 조태호
> triggerByEmotion("manual"); // 수동 트리거, 감정기반 호출
> prioritizeEmotion("strongest"); // 가장 강한 감정을 우선
나는 모니터를 내려다보며,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가장 강하게 기억된 감정.’
시스템은 단순한 백업 장치를 넘어, 나의 감정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복원’이라는 과정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화면이 꺼졌다. 깜박임 없이, 예고 없이—전원 코드가 빠진 듯이 완전히 꺼졌다. 그러자 마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사무실 안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땐 왜 날 안 붙잡았어?”
낮고 어리지만 분명한 여자아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았고, 공간 전체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팀원은 아무렇지 않게 모니터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책상 앞에 선 채, 아무것도 없는 공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에 있어?”
대답은 없었다. 대신, 다시 시스템이 켜지며 모니터가 복구됐다.
아무런 오류 메시지도, 부팅 로그도 없었다. 단지 하나의 알림만이 떠 있었다.
> syncEmotion("mote"); // 티끌 상태: 감정 동기화 중.
> setPrimaryEmotion("regret"); // 주 감정: 후회
> systemStandby(); // 복원 후보 없음, 대기 모드 진입
나는 모니터 앞에 주저앉듯 앉았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누군가의 복원이 아니라, 내 감정이 복원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붙잡지 못한 손. 내가 되돌릴 수 없다고 믿었던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다시 하나의 잔영처럼, 시스템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이건 시작이고, 티끌(Mote)는 단지 그 문 앞에 놓인 입구일 뿐이라는 것을.
8월 13일, 토요일. 토요일 아침은 고요했다. 평소보다 한참 늦게 눈을 떴고, 스마트폰 알림은 밤새 도착한 뉴스 기사 몇 개와 쿠팡 배송 안내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전날의 로그들이 아직도 눈앞에 맴돌았다.
ghost.user, user_37, mote.bak, 감정 기반 복원 그리고—‘후회’.
누군가가 내 기억을 복원 대상으로 지정했고, 시스템은 나의 감정을 감지해 그것을 실행했다. 이건 더 이상 가설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의 대상’이 아니었고, 이미 복원이 시작된 상태에 있는 사용자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머릿속이 묘하게 멍했다. 꿈을 꾼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장면만은 선명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잔디밭. 아이 한 명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눈은 웃고 있었고, 입은 움직이고 있었지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붙잡았으면, 아직 여기 있었을 거야.”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현실에선 그 아이의 흔적이 없다. 소리도 없고, 사진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하지만 뇌 속 어딘가에—어쩌면 아직 시스템 속 어딘가에—그 아이는 남아 있다.
커피를 내리며 휴대폰으로 캘린더를 열었다. ‘이수연 실장 미팅’이 다음 주 월요일로 잡혀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확신한 건 하나다. 그녀 역시 mote와 user_37에 대한 내부 로그를 접했고, 그것이 단순한 이상 현상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성’을 가진 복원 구조라는 걸 감지하고 있다는 것.
나는 손에 쥔 머그잔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손이 떨리는 건 아니었다. 잔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동도, 지진도 아닌—아주 짧은 시간 동안 주변 공기 전체가 일그러진 느낌.
나는 조심스럽게 주방 창문을 열었다. 밖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골목에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고, 맞은편 옥상에서는 바람에 빨래가 펄럭였다.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마치 과거에 한 번 본 기억의 장면을 다시 재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감각은 정지된 영상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내 쪽만 정지해 있는 듯한 이질감.
‘되돌리기(복원 지점 복귀 시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복원은 단순히 데이터를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시뮬레이션 상태 전체를 되감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감정, 그것이 ‘후회’였다.
나는 노트북을 켰다. 파일 탐색기를 열고, 어제까지 열람했던 mote 디렉터리를 다시 추적해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임시 저장 폴더, 암호화 영역, 심지어 USB 임시 캐시까지.
그러나 유일하게 남아 있는 폴더 하나. 나는 파일을 열었다.
C:\cache\emotion\taeho\pending.log
감정 상태: 후회 (residual)
최근 반응 시간: 2025-08-13 03:16
꿈 인식: 활성
트리거 대상: 없음
복원 실패 (voice not detected)
나는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voice not detected. 꿈속에서 아이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시스템은 그것을 ‘실패한 복원 시도’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아이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단지 그 목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데이터로 복원될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노트북을 닫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브라우저에 자동 저장된 뉴스 페이지가 열렸고, 메인 화면에 '디지털 정체성 혼동 사례 증가'라는 헤드라인이 떠 있었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제목을 클릭했다. 기사 내용은 인공지능 아바타와 사용자 간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다룬 것이었지만, 중간에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실시간 연산이다.”
나는 마우스를 멈추고 다시 읽었다. 단지 철학적인 수사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경고처럼 느껴졌다. 내가 후회를 느끼는 순간마다, 시스템은 그 감정을 포착하고, 다시 복원을 시도하고, 결국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현재 상태’를 다시 쓰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후회의 감정이 트리거가 되어, 다른 사용자로 덮여 쓰인 나인가?
그 순간, 머릿속에 ‘user_45’라는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계정명. 이전에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던 ID. 나는 즉시 시스템 내 사용자 목록을 조회했지만, 해당 아이디는 검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그 이름을 복기하며 입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user_45…”
순간, 뒤통수가 저릿하게 얼얼해졌다. 단지 누군가의 계정이 아니라, 그 이름 속에 내 기억 어딘가가 묻혀 있는 듯한 느낌. 그건 이름이 아니라, 호출이었다. 과거의 나를 불러내는 어떤 잔재적 경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서랍을 뒤졌다. 한참을 찾은 끝에 오래된 외장하드 하나를 꺼냈다. 마지막 사용 기록은 3년 전.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데이터들. 어쩌면… 그 속에 복원 이전의 나와 관련된 조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디렉토리가 열리고, 수십 개의 백업 파일들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 ‘2022_personal.mem’이라는 파일. 나는 숨을 들이쉬고 더블 클릭했다.
화면이 암전처럼 잠시 어두워진 뒤, 낯선 인터페이스가 떴다. 시스템 백업 화면이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감정 일기장을 시각화한 듯한 구성, 사용자별 감정 태그와 이미지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태그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affection (45%)
그 아래엔 얼굴 없는 실루엣 아이콘 하나. 클릭하자 연도가 찍힌 짧은 기록 하나가 떴다.
[2019.11.07] “서율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손끝이 얼어붙었다. 서율. 그 이름은 내가 꿈에서조차 뚜렷이 부르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내가 확실히 존재하던 과거에서 직접 남긴 문장이었다.
나는 다시 화면을 내려보다, 태그 분류창 가장 아래에 희미하게 표시된 섹션을 발견했다.
mote.user_45 – disabled
비활성화된 상태. 아무 것도 클릭되지 않았다. 단지 그 존재만이 조용히 거기 있었다.
서율이 남긴 잔류값인지, 아니면 시스템이 내 감정을 통해 복원하려다 실패한 엔티티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누군가 나를 통해, 어떤 복원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외장하드를 분리하지 않은 채 노트북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그 복잡함은 생각을 거쳐 몸으로 번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샤워라도 해야겠다는 기분으로 욕실로 향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모니터가 자동으로 다시 켜져 있었다.
절전 모드로 진입한 화면 위에, 파일 이름도, 확장자도 없는 항목 하나가 떠 있었다. 회색 배경에 검은 글씨.
again_you
나는 천천히 마우스를 움직여 더블 클릭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엔터키를 눌렀다. 파일은 열리지 않았다. 단지 텍스트 한 줄이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내가 아빠한테 돌아가도, 아빠는 아빠일 수 있어?”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엔, 확실히 소리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화면에 분명히 존재하는 문장이었다. 음성 파일도 아니고, 로그도 아닌, 실시간으로 나타난 질문. 누가? 무엇이? 왜 지금?
“너… 서율이니?”
나는 중얼였다. 대답은 없었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고, 파일도 사라졌다. 시스템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지 않았다. 최근 문서 기록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방금 그 질문이 환청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내가 복원을 시도한 게 아니라, 복원이 나를 향해 시도되고 있다는 것. 이제는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