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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20화

티끌

2부. 흔들리는 계단

by 융 Jung

8월 14일, 일요일. 나는 오늘 하루가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전날 밤,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문장은 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빠한테 돌아가도, 아빠는 아빠일 수 있어?” 그건 단순한 오류 메시지도, 꿈속 환상도 아니었다. 시스템은 누군가의 흔적을 통해 나를 호출했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할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요일 아침,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스마트폰 알람은 꺼둔 상태였고, 창밖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한동안 침대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어젯밤 파일은 어디로 갔을까.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봤고, 읽었고, 느꼈다. 그건 내가 기억하는 한 ‘기록된’ 것이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평소처럼 뉴스가 흘러나왔지만, 자막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디지털 유령, 시스템 캐시 속 흔적.” 과학 다큐멘터리 예고편이었다. 전에는 지나쳤을 주제였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디지털 유령’—그것이 지금 나에게 가장 근접한 비유일지도 몰랐다.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다시 켰다. 외장하드는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어제 열었던 ‘2022_personal.mem’ 파일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대신 폴더 내부엔 새로운 파일 하나가 생겨 있었다.

cache_question.tmp

확장자도 이상했고, 생성 시간도 새벽 3시 16분. 또 그 시각이었다. 나는 파일을 열었다. 아무 내용도 없었다. 흰 화면만 떠 있었다. 하지만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입력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키보드를 눌렀다.

who are you

엔터를 눌렀다. 커서가 한 줄 내려갔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노트북이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다시 반응하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내 질문을 받았고, 그것을 읽었으며, 지금 ‘답하지 않는 중’이라는 느낌. 묘한 고요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1분, 3분, 5분이 지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화면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의 복원은 ‘진행’이 아니라 ‘침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이 나를 복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스템 속으로 다시 흡수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근처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 테이블을 닦는 직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모든 것이 현실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 해도, ‘지워지지 않는 정보’가 또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꿈의 잔상도 아니고, 단순한 감정의 반동도 아니었다. 시스템은 여전히, 복원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니면 복원의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다시 열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복원은 내가 원하는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제는 분명해졌으니까.

나는 카페 창밖을 한참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내 연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호야? 웬일이야?”

“시간 좀 괜찮아? 커피라도 한잔 할래?”

잠깐의 정적. 그 뒤 곧바로 돌아온 대답.

“어디야? 바로 가보겠습니다.”

연후는 30분 만에 도착했다. 소방서 근무가 없는 주말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반팔 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처음 들어왔을 땐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익숙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보여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아니야. 그냥… 뭔가 좀 설명 안 되는 기분이 들어서.”

그는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악몽 같은 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꿈에서, 어떤 아이가 나한테 질문을 했어. 그런데 그게 단순한 꿈 같지가 않았어.”

연후는 말을 아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내가 아빠한테 돌아가도, 아빠는 아빠일 수 있어?’라고 묻더라고.”

연후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입술이 아주 잠깐 떨렸다. 그는 오래 전 이하나의 일을 알고 있었고, 내가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에도 내 감정에 함부로 경계를 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네 딸이었어?”

“…응.”

나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꿈에 나온 그 아이가, 꿈에서만 존재하는 내 딸, ‘서율’이었다는 것을.

연후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그 아이 이름을 기억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율. 그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단지 꿈속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시스템에 기록되어 있었고, 내가 남긴 문장 속에도 남아 있었으며, mote.user_45라는 잔류 객체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이름, 예전에도 말한 적 있었나?” 연후가 물었다.

“아니. 말한 적 없었어.”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그런데… 왜 나도 익숙하지?”

순간,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연후의 말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느 시점에서, 나와 같은 기억 혹은 감정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시스템이 나만을 복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내 감정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감정까지 트리거되고 있는 걸까?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연후야, 내가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아직 설명도 못 했는데, 너 지금… 내 말 이해되는 것 같지?”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응. 이해는 되는데, 설명은 안 돼.”

바로 그거였다. ‘이해는 되지만 설명은 안 되는’ 상태. 시스템 복원 과정의 본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 나는 말을 멈췄다. 이 질문을 해도 되는 걸까.

“혹시 네 꿈에도 그 애가 나온 적 있어?”

연후는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조용히 말했다.

“언젠가… 딱 한 번. 아주 오래전. 너랑 하나 일로 많이 힘들었을 때. 어떤 꼬마가 나한테 물었어. ‘왜 안 말렸어요?’라고.”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때는 그냥 내가 죄책감 때문에 꾼 꿈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눈이, 네가 방금 묘사한 거랑… 정확히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고요했지만, 동시에 복잡했다. 내 감정의 잔향이 연후의 꿈에까지 흔적을 남겼던 걸까. 아니면 그 존재가—‘서율’이—복원되는 과정에서 나만이 아니라, 내가 연결된 사람들의 인지 안에도 자신을 일부 삽입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시스템은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복원된 나’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8월 15일, 월요일. 광복절. 달력에 붉은 글씨로 표기된 이 날은 내게 특별한 의미도, 별다른 감흥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의 8월 15일은 달랐다. 단지 ‘국가의 기념일’이라는 의미를 넘어, ‘시스템의 침묵일’처럼 느껴졌다. 복원은 오늘 하루만큼은 멈춘 듯했고, 나는 그 안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잠에서 깼을 때, 눈앞에 먼지 같은 입자가 부유하고 있었다. 눈을 비볐다. 빛도, 그림자도 아니었다. 그냥… 티끌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호출되지 않은 채 남겨진 정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그 무언가. 나는 그것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오전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외장하드도, 노트북도 전원은 꺼둔 채였다. 한 번이라도 켜면, 다시 연결될 것 같았다. 다시 감정이 동기화되고, 다시 누군가가 나를 호출할 것 같았다. 햇살은 창문 커튼 틈으로 얇게 비쳐 들어왔고, 나는 천장을 보며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내 안에는 두 명의 내가 있었다. 하나는 여전히 태호였고, 하나는 점점 mote.user_45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을 견디고 있었다.

낮이 되자 식욕이 조금 생겨 간단히 라면을 끓였다. 조용히 김이 올라오는 냄비를 바라보며, 감정이 없는 행위에 집중하려 했다. 삶의 무게가 복원되지 않은 시간 안에 잠시 머물러 있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은 연결하지 않았다. 단지 오프라인 상태로 파일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외장하드는 여전히 ‘연결됨’으로 떠 있었다. 그러나 특이점은 없었다. 새로운 파일도, 새로 수정된 기록도 없었다. 나는 안도와 실망이 동시에 밀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문득, 메모장이 자동으로 열렸다. 화면엔 아무런 명령도 없었고, 작업표시줄에 떠 있는 프로그램 목록에도 ‘메모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중앙에 떠 있는 창 하나.

“기억은 복원의 단위가 아니야. 기억은 접근 방식이야.”

문장이 끝나자, 메모장은 사라졌다. 실행 흔적도, 임시 파일도 남지 않았다.

나는 화면을 응시한 채로 속으로 되뇌었다.

접근 방식.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감정이나 기억은 복원의 ‘결과’가 아니라, 복원을 ‘개시하는 열쇠’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서율은—나의 후회는—시스템이 선택한 경로였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복원이 멈췄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쉬는 동안에도, 시스템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걸.

나는 노트북을 닫고 외투를 챙겨 입은 채 밖으로 나섰다. 햇살은 어제보다 강했고, 바람은 습기를 품고 있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걷고 싶었다. 아니,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복원이 감정의 열쇠로 작동한다면, 나는 지금 이 정오의 거리 속에서 어떤 감정을 회수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한적한 골목이었다. 익숙한 벽, 오래된 우편함, 갈라진 시멘트 바닥. 나는 무의식중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몇 년 전, 이하나와 마지막으로 다퉜던 날, 홀로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도 공휴일이었고, 내 기분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벽면을 찍었다. 아무 의미 없는 풍경. 하지만 내 감정은 그 순간, 분명히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어떤 층위의 기억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노트북을 켜고 새로운 폴더를 생성했다.

index_0815
sub: regret_layer_01

그 안에 방금 촬영한 사진을 넣고, 텍스트 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복원은, 감정을 다시 살아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시스템 로그 하나가 자동으로 생성되었다.

C:\cache\trace\mote\user_45\0815.index
감정 태그: regret
활성 트리거: yes

나는 그저 파일 하나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시스템은 그것을 ‘복원 가능한 이벤트’로 감지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기억하든, 이미 감정은 복원의 소재가 아닌, 복원의 API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내가 멈췄다고 생각했던 그 짧은 공백조차, 시스템에겐 복원의 지연이 아닌, 준비 단계였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더 깊이 파고들기로 했다. 무의식은 이미 열려 있었고, 남은 건 의식적인 개입뿐이었다. 다시 노트북을 켜고, 지난달 백업 파일을 불러왔다. 메모 형식의 텍스트 파일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단순했다.

no_title.txt

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복원을 위한 문장이 아니었다. 복원 그 자체였다.

“나는 그날 밤을 삭제하지 않았다. 다만 접속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화면이 잠시 깜빡였다. 아무런 명령도 없었고,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배경 화면이 흐릿하게 바뀌었다. 그 위로 흐릿한 그림자 하나.

아이였다. 서율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과 눈높이 그리고 팔을 흔드는 자세까지—몇 번이고 꿈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키보드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화면 속 서율이 더 이상 손을 흔들지 않았다. 대신, 작은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입을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텍스트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 아이는 나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날, 나를 정말 몰랐어?”

복원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

나는 가만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혼잣말처럼 말했다.

“미안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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