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02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라는 시설은 산골 마을의 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곳은 동네에서 몇 안 되는 양옥집에 사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이었고, 태수와 같은 농가의 아이들은 처음부터 발길조차 들일 수 없었다. 태수가 태어난 이후로 마을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가 없었기에, 그는 늘 혼자였다. 외로운 줄도 모르고 논두렁을 달리고, 고추밭 사이를 헤집고, 개울물에 발을 담그며 살았다. 여름이면 잠자리채를 휘두르다 허탕을 치고도 금세 웃음을 터뜨렸고, 가을이면 산비탈에 널린 밤송이를 주워 장난처럼 돌로 까먹으며 노랗게 물든 숲길을 걸었다.
어른들은 처음엔 어린아이가 홀로 산과 개울을 누비는 것이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태수가 돌과 괭이로 살모사를 직접 잡아 죽여 손에 들고 온 적이 있었다. 그 작은 손에 뱀이 매달려 휘청거릴 때의 흥분된 얼굴, 승리감을 감추지 못한 눈빛을 보고 난 후부터는 부모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이미 그의 발길은 어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뻗어 있었고, 막아서기에는 아이의 기운이 너무 세차 보였다.
태수의 부모는 농사일에 매달려 늘 바빴다. 모내기철이면 해가 뜨기도 전에 논에 나갔고, 가을 수확철이면 밤이 깊어도 낫을 놓지 못했다. 집에 남아 있는 것은 늙은 두 노인이었는데, 혈기왕성한 사내아이 하나를 붙잡아두기란 역부족이었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댔고, 할머니는 밥 짓고 고추 말리는 일로 하루해를 다 보냈다. 그 사이에서 태수는 아무도 막지 않는 자유를 누렸지만, 그 자유는 종종 고독을 불러왔다.
동네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태수는 늘 그들의 집으로 달음질쳤다. 그러나 형들에게 그는 귀찮은 꼬마였다. 그럼에도 어른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형들은 마지못해 그를 받아주었다. 구슬치기에서 한 판 끼워주거나, 술래잡기에서 술래를 맡기는 식이었다. 겉으로는 어울려 주었으나, 그들과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늘 존재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드디어 태수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즈음이 되었다. 그러나 분교에 학생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학년을 모두 합해도 여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각기 나이가 다르고 배움의 속도도 다른 아이들을 한꺼번에 가르쳐야 했으니, 교사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분교에 홀로 부임한 젊은 교사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낯선 도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야 했고, 그가 가진 것은 혈기왕성한 패기뿐이었다. 아무리 열정이 넘쳐도 학년마다 교과를 제대로 진행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는 고민 끝에, 차라리 한 가지씩 묶어서 천천히 가르치기로 했다. 그래서 한 학기는 시계를 보는 방법만, 그다음 학기는 구구단 외우기만 가르치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지루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는 생활의 작은 일부였고, 학교는 오히려 흩어져 있는 여러 마을 아이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가끔 날씨가 유달리 좋은 날이면 교사는 책을 덮어버리고 학생들을 데리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학교 앞에 걸린 시멘트 다리 아래 냇물로 내려가면, 가재들이 돌 밑에서 더듬이를 까딱이며 숨어 있었다. 아이들은 소리 지르며 손을 집어넣었고, 교사도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함께 물장구를 쳤다. 또 학교 울타리 너머 밭에는 포도나무가 자라 있었는데, 열매가 송이송이 익어가면 아이들은 몰래 울타리를 넘어가 포도를 따먹기도 했다. 교사는 일부러 눈을 돌리며 못 본 체했으나, 정작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 보랏빛 포도를 입안에 털어 넣을 때가 더 많았다.
학교 시설은 낡아 있었다. 운동장의 그네는 삐걱거리며 언제 끊어질지 모를 만큼 낡았고, 교실의 나무책상은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다. 그럴 때면 교사가 직접 손을 보았다. 썩어 빠진 그네 의자를 떼어내고 두꺼운 나무판을 새로 잘라 매달아 주었을 때, 아이들의 눈빛은 세상의 어떤 장난감보다도 반짝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2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국민학교가 곧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꾼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분교에는 오히려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생 수는 줄어들기만 했고,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폐교가 결정되었다. 젊은 교사는 명예로운 경력을 인정받으며 읍내의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떠나는 날, 그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정작 눈시울은 본인이 더 붉어 있었다.
학교가 사라진 후, 태수는 더 이상 배움의 터전을 가질 수 없었다. 부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집안의 친척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는 서울로, 어린 태수를 유학 보내는 길이었다. 태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대구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탔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산과 들, 아직 채 꺼지지 않은 연탄불 냄새가 뒤섞인 겨울 하늘은 그에게 낯설고도 두려운 새로운 세상의 예고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