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02
진아가 처음 영어 유치원에 발을 들인 것은 또래보다 빠른 편이었다. 그곳에서는 알파벳 노래와 동화책 낭독이 일상이었고, 아이들이 영어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숙은 곧 한계를 느꼈다. 단순한 회화 위주의 프로그램보다는 체계적인 국제학교 부설 유치원이 훨씬 낫다는 주변의 권유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결국 발이 넓은 남편을 채근해 알음알음 다리를 놓아, 흔치 않은 기회를 어렵사리 얻어냈다. 지숙은 그것을 하나의 성취처럼 여겼다. 마치 딸의 미래를 조금 더 넓은 길 위에 올려놓았다는 확신 같은 것이 그녀를 지탱했다.
부설 유치원에 들어선 진아의 유년은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졌다. 교실 벽에는 전 세계에서 온 아이들의 그림과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점심시간이면 여러 나라의 음식 냄새가 뒤섞였다. 김밥을 싸 온 진아는 처음엔 창피스러워했으나 곧 친구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그곳에서는 영어가 당연히 생활의 기본이었으나, 진아는 이상하게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말하려 들지 않아도 친구들이 알아듣고, 자신도 서툰 단어들을 맞춰가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아이들은 대개 외국 기업의 주재원이나 외교관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을 잠시 머무는 낯선 땅쯤으로 여겼고, 입버릇처럼 “우리나라가 더 좋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반면, 진아와 비슷하거나 더디게 배우는 아이들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든다며 한국이 좋다고 했다. 그런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 중간에 놓인 진아는 아이들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언어를 빨리 습득하는 재능을 보여주던 아이로서, 친구들의 호기심과 호의를 한 몸에 누렸다. 때때로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면, 넓은 거실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고급 가구와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국적이 다른 아이들이 섞여 뛰노는 풍경은, 이웃들에게도 부러움 섞인 구경거리였다.
그 무렵 진아의 사교육은 지숙이 어렵게 구한 육아도우미 성숙이 도맡았다. 성숙은 단순한 가사도우미가 아니라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한 전문성이 있었고, 실제 유치원에서 근무한 경험까지 지닌, 마흔을 갓 넘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조혼하여 일찍 둔 두 자식을 이미 대학에 보낸 경력을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큰아들은 의대에, 딸은 약대에 진학했다고 했다. “아이를 잘 키우는 건 원칙을 세우는 거예요.” 그녀는 늘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의 교육자 됨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지숙은 처음엔 그 당당함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확신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느껴졌다.
성숙의 지도를 받으며 진아는 필요한 학원과 교재를 밟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억지가 아니라 놀이처럼 주어졌다. 성숙은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작은 간식이나 스티커를 상으로 주었고, 영어 단어를 외울 때도 짧은 노래로 바꾸어 아이가 스스로 따라 부르게 했다. 덕분에 진아에게 공부란 여러 재미난 것들 중 조금 어려운 것에 불과했다. 놀이와 도전의 경계선에서 진아는 자연스럽게 집중했고,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치원을 졸업할 즈음, 진아는 이미 미국 초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주변 부모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성숙의 손길은 단순히 도움이 아니라,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끌어주는 듯 탁월했다. 지숙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임했고, 급기야 웃돈까지 제시하며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 맡아달라며 애써 부탁할 정도였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진아는 교복을 입게 되었다. 얇은 옷감은 금세 해졌고, 뛰어놀 때마다 무릎이 까졌다. 아무리 부지런한 가사도우미가 있어도 날마다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숙은 아예 여벌 교복을 여러 벌 사두었다. 덕분에 진아는 쉬는 시간마다 땀을 흘리며 놀다가도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보송보송한 새 교복을 입고 등교할 수 있었다. 통학버스를 기다리던 순간부터 진아는 늘 들뜼고, 학교 수업은 너무 쉬워서 처음에는 심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손을 들어 정답을 맞히는 일이 재미로 다가왔고, 친구들 앞에서 칭찬받는 즐거움에 점점 빠져들었다.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진아의 집안에서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동안 집안에서 자연스레 ‘보육교사’라 불리게 된 성숙이 아들의 성화에 떠밀려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자식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가니 이제 그만 편히 지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성숙은 미리 그 이야기를 꺼냈고, 새 사람을 구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그래서 지숙은 크게 애쓰지 않고도 새로운 교사를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진아는 오래 함께했던 성숙의 빈자리를 쉽게 잊지 못했다. 집안의 공기마저 달라진 듯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