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11
겨울방학이 시작하고 몇 주 뒤인 일 월, 진아는 학원을 다니고, 학원숙제와 학교의 방학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들은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것으로 시작해서, 교재를 펼쳐 문제를 풀고, 틈틈이 학원에 다녀오는 것으로 이어졌다. 방학이라는 말과는 달리 하루는 오히려 더 바쁘게 흘러갔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잠시 바라보다가도 곧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려야 했다. 이번 방학에는 외국으로도, 제주도로도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커다란 캐리어를 열어 옷을 넣고, 공항에서 사진을 찍고, 낯선 공기를 만끽하며 가족과 웃음을 나누던 지난 방학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에 진아는 아빠의 사업이 남들처럼 쇄락해 가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곤궁해지고 있기 때문에 국외로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이라 짐작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교재를 펼쳐 놓고 연필을 잡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줄 알았지만, 멀찍이 그 모습을 눈여겨본 가정교사 수진이 지숙에게 알려주고 나서야 진아는 이전의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남들과 다르게 아빠의 사업은 전에 없을 만큼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집안 사정은 더 넉넉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진아는 한동안 혼자만의 오해가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좋은 일일수록 기쁜 일일수록 숨겨야만 하는 때가 있음을 진아는 배워야 했다. 남들에게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나고 남들이 슬퍼할 때가 그랬다. 어린 마음에도, 기쁜 얼굴을 함부로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것이다.
그녀는 학원에서도 세상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집에서 가사도우미 이모가 떠나고 엄마가 직접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어떤 친구는 엄마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고도 했다. 예전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주말에 놀러 간 곳이나 새로 산 학용품 이야기가 오갔지만, 요즘은 집안 형편과 관련된 이야기가 불쑥불쑥 나왔다. 또 어떤 친구는 다음 달이 되면 학원을 다니지 않게 될 거라고 했다. 학원에 다니기를 그토록 끔찍하게 싫어했던 친구가 앞으로 학원을 다니지 않게 된다며 말할 때 즐거워하기는커녕 울먹이기까지 하자 진아는 마음이 아팠다. 그 아이가 눈가를 붉히며 웃음을 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눈물이 결코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된 슬픔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진아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학원친구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다. 빈자리가 늘어난 교실은 이상하게도 넓어 보였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친구가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다. 진아는 늘 함께 웃던 얼굴들을 떠올리며 의자에 앉았지만, 수업시간의 공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진아는 방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가방을 벗어 거실 식탁에 올려놓고는 주방에서 차를 마시며 쉬는 가사도우미에게 따뜻한 우유를 부탁했다. 그때 진아의 얼굴은 한껏 지쳐 있었고, 작은 어깨는 책가방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에 눌린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턱을 괴고 다리를 흔들고 있을 때 가사도우미가 김이 피어나는 우유를 받쳐 내어 왔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은 겨울 바깥공기의 매서움과 대비되어 집 안의 온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우리 진아, 오늘도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그녀는 친숙하면서도 따뜻한 우유 같은 목소리로 진아에게 말을 건넸다. 그 음성은 집안의 습기를 말릴 때 이따금 지피는 벽난로와 같이 따스하게 마음을 풀어 주었다.
“죄송해요, 이모. 그러고 보니 집에 들어오면서 인사도 안 드렸어요.”
진아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괜찮아, 요즘 같은 시절에는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란다.”
가사도우미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빙긋 웃었다. 진아는 그 미소 속에서 오래된 삶의 무게와 단단한 믿음을 동시에 느꼈다.
“저도 뉴스로 봤어요. 어떤 아저씨는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가족들한테 차마 말을 못 해가지고 회사로 출근하는 척을 한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했대요. 사실은, 학원에서도 안 좋은 이야기가 친구들 사이에 돌아요. 누구누구는 곧 거지가 될 거라면서, 학원에 나오지 못하게 될 거라면서. 역시, 세상엔 착한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진아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말끝은 떨렸다. 어른들의 세상이 아이들 대화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두려웠다.
“우리 진아는 영특하기도 하지. 사실이란다. 세상이 착한 사람들로만 가득하다면 착한 사람이라는 단어도 없을 테지. 어른이나 어린이나 같아. 진아의 부모님처럼 착한 어른들도 있고, 뉴스에 나오는 도둑이나 강도 같은 나쁜 어른도 있지. 마찬가지야. 착한 어린이도 있고, 나쁜 어린이도 있어. 그런 나쁜 아이들은 다른 친구가 겪는 고통이나 슬픔에는 관심이 없지. 그래. 관심이 아주 없기라도 하면 다행이게. 정말 나쁜 아이들은 그걸 두고 놀리고 흉을 잡는 단다. 그렇지만 진아야, 걱정 마렴. 진아의 아빠는 무척 훌륭한 분이란다. 내가 만나본 사장님들 중에서도 단연 가장 훌륭한 분이지. 결코 진아네 집이 가난으로 힘들어질 일은 없을 거야.”
가사도우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지만 힘이 있었다. 진아는 그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이모.”
진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말과 함께 눈빛이 맑아졌다. 이따금 짜증이 날 때면 ‘도우미 이모’라고 부르는 것으로 불만을 티 내던 과거를 반성했다. 지금은 단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진아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다독여 주는 가족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조용하고 푸근해 보이는 가사도우미가 나직이 물었다.
“오늘 나하고 나눈 이야기는 누구누구 하고 비밀로 할까?”
그녀의 익숙한 질문에 진아는 활짝 웃으며,
“엄마랑 아빠, 기사님들한테요.”
라고 익숙하게 대답했다. 웃음 속에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진 선생님 오려면 한 시간 남았으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렴.”
가사도우미는 본인의 좋은 사람 됨됨이가 진아의 입을 통해 사장과 사모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반쯤 남은 우유 잔을 챙겨 주방으로 돌아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