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12
재웅과 싸운 지도 벌써 이 주일이 지났다. 그날 오후, 하교 시간이 지나고 운동장 한쪽은 고요했으며,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조차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소각장 옆, 오래된 우유 창고의 그림자 속에서 둘은 맞붙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고, 누구도 지켜보지 않았다. 그곳은 아이들 사이에서 은밀한 결투장이었고, 오늘의 싸움은 그들의 위계를 뒤바꿀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손가락 네 개가 비틀려 부러진 재웅은 태수의 낡은 운동화와 차갑고 거친 시멘트 바닥 사이에 양 볼을 짓이긴 채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흙먼지와 석회 가루가 뒤섞여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항복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분명히 절망의 외마디가 아니라 간신히 숨을 부지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태수의 얼굴은 왼쪽 절반이 이미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고, 터져 나온 피는 코와 입술을 타고 흘러내려 턱을 적셨다. 피가 마르며 피부 위에 검붉은 껍질을 만들었지만 그마저도 계속 솟구치는 붉은 액체에 의해 곧장 무너져내렸다. 서로가 그 자세 그대로 거친 숨을 몰아쉴 때, 재웅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그렇게만 해주면 항복하겠다고,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그러나 태수는 그의 간청을 듣고도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재웅의 얼굴을 밟고 있던 발을 잠시 떼었다가, 체중을 실어 다해 다시 내려찍었다. 순간 발 밑에서 연약하게 으깨지는 감각이 전해졌고, 그 둔탁한 소리에 재웅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발목을 비비며 힘을 더하자 낡은 운동화의 고무창 너머로 뭉개지는 재웅의 귓바퀴가 느껴졌다. 태수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오랫동안 눌려왔던 수치심의 뒤엉킴이었다.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태수는 낮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말해봐.”
“아니야, 아니야, 비밀로 안 해도 돼. 항복, 항복. 제발 좀 그만 때려.”
재웅의 마지막 말은 오히려 태수의 가슴속에 있던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 말은 자신이 과거에 울부짖으며 애원하던 순간마다 재웅이 비웃듯 내뱉던 조롱의 메아리를 불러냈다. 태수는 치를 떨며 고개를 젖혔다.
“내가 그만 때리라고 애원할 때, 너는!”
태수는 곧장 재웅의 등 위에 올라탔다. 시멘트 바닥에서 들려오는 재웅의 신음이 진동처럼 온몸을 타고 흘러왔다. 두 손으로 그의 왼팔을 거칠게 잡아 비틀었다. 어떻게 해야 팔이 부러지는지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재웅이 더 괴로워하는 각도를 찾았다. 손목을 꺾으며 힘껏 당기자, 그 순간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이 태수의 손끝을 파고들었다. 이어지는 것은 찢어지는 듯한 재웅의 비명이었고, 그 울음은 소각장의 빈 공간을 가득 메우며 메아리쳤다.
지칠 대로 지친 태수는 결국 재웅의 등에서 내려왔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온몸이 진동하듯 떨렸고, 손끝은 아직도 방금 전의 파괴적인 힘의 기억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 울먹이며 욕을 내뱉는 재웅의 얼굴이 들어왔다. 눈물이 먼지와 섞여 얼룩이 되었고, 그 모습은 비참함과 분노가 한데 얽혀 있었다.
“내일 아침에 학교에 오면, 네가 먼저 나한테 싸워서 졌다고 애들한테 말 해.”
태수의 목소리는 쉰 숨결과 함께 떨어졌다. 그러나 재웅은 대꾸하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욕설은 점차 흐려졌고, 오직 공포와 고통이 그의 표정을 뒤덮었다. 태수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열린 소각로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각목을 하나 집어 들었다. 끝이 검게 타 연기만 피어오르는 나무였다. 긴장은 아직 풀리지 않아 손은 떨렸고, 그 각목이 조금씩 재웅의 얼굴로 다가가자 재웅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알았어, 알았어, 말할게, 말할게.”
다음 날이 되었지만, 재웅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태수의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장난삼아 태수를 밀치려던 몇몇 아이들은, 흉측하게 망가진 그의 얼굴에서 멍과 피딱지, 그 사이에서 번뜩이는 눈빛을 보고는 주춤하며 뒷걸음질쳤다. 그 눈은 더 이상 피해자의 눈이 아니었다. 상처투성이의 얼굴 속에서도 생기와 살기가 얽혀 있는 눈빛은 누구도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태수가 앞쪽 자리인 재웅의 책상을 힘껏 엎어버리고 책을 찢어도, 아무도 나서서 그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재웅의 교과서 한 권이 튕겨나가 수연의 등을 치자 태수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당황한 듯 얼버무렸다.
“미안…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부터는, 태수는 삶 전체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날까 걱정했지만, 선생님은 재웅도 태수도 부르지 않았다. 재웅의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뺨이라도 때릴까 두려워했지만, 그런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석고붕대를 감은 재웅이 뜻밖에도 태수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지켜줄 보호막이라도 되길 바라는 듯한 집착 같았다. 그러나 태수의 눈에 그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였다.
재웅은 아이들 사이에서 점차 무시당하고 있었다.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를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얕보았다. 태수는 그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재웅과 같은 급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 직감이 밀려왔다. 누군가보다 나은 취급을 받아야만, 그래야 자신이 피라미드의 바닥에서 한 계단이라도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다.
그래서 태수는 재웅의 접근을 막기 위해 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재웅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상은 명령이자 굴욕의 강요였다. 임무라는 표현은 삼갔다. 첫 번째 조건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했던 못된 짓을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수연에게 저지른 장난질부터 사과하라고 못박았다. 두 번째는, 함께 문구점에 가서 자신이 태수에게 도둑질을 시켰던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었다. 사탕을 훔치라며 부추겼던 일을 모두 앞에서 밝히라는 것이었다.
재웅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행동은 달랐다. 모든 아이들의 앞에서 죄인이 되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따돌림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첫 번째 조건은 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차마 입도 떼지 못했다. 문구점에서 저지른 일을 자백한다면 선생님뿐 아니라 부모, 나아가 경찰까지 알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태수는 그런 재웅의 태도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겁쟁이의 눈빛이 아니라, 위계의 맨 밑바닥에 깔려 쓰러져가는 자의 눈빛이었다.
태수에게는 처음으로 시골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서울에 남고 싶은 방학이 찾아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