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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그와 일요일의 그녀

태수 13

by 융 Jung

태수 13

겨울 방학에 주로 하는 일이란 수확의 뒷정리와 새로운 수확을 위한 준비가 전부였지만 옷 틈새로 파고드는 추위 탓에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사과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잘린 가지를 모아 과수원 가장자리의 언덕 아래로 끌고 가서 버리는 일을 전지라고 불렀는데, 가시처럼 얼어붙은 나뭇가지에 뺨이 스치면 칼 끝으로 베이듯 상처가 났다. 다행히 피는 흐르기 전에 얼어붙었고, 그 때문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야 상처가 생긴 걸 아는 경우도 흔했다. 태수는 어떤 가지를 살려두고 또 어떤 가지를 잘라낼지를 정하는 아버지가 멋져 보였다. 아직은 그가 깨닫지 못한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 아버지를 더욱 어른스러워 보이게 했다. 전지가 마무리될 무렵, 태수와 그의 아버지는 고추밭으로 향했다.

수확철에는 가장 고생스러웠던 고추밭이었건만, 농한기의 고추밭 일은 한결 쉬웠다. 차고 건조한 공기에 바싹 마른 고추줄기를 딱딱한 땅에서 뽑아내고 뿌리에 붙은 귀한 흙을 털어낸 다음 아버지가 밭의 한가운데에 지핀 불에 던져 넣는 일은 더러 재미있기까지 했다. 태수가 고랑과 고랑마다 깔려 있는 검은색 비닐을 걷어낼 즈음, 그의 아버지는 새우깡 무늬의 무쇠 말뚝을 뽑아내어 빨랫줄로 다발을 묶기 시작했다. 태수는 불현듯 궁금해져서,

“아버지, 말뚝은 몇 개씩 묶어요?”

“그런 거 없다. 들 수 있을 만큼 묶지. 열다섯 개씩, 이보다 좀 많거나, 좀 적거나. 니도 들 수 있을 만 침 조금씩 묶으까?”

“그 정도는 저도 들어요. 많이 컸으니까.”

“게안타. 고마, 니는 이런 거 들지 말아라. 네 어머니가 카드라, 무릎이 마이 아프다꼬. 성장통인가베.”

“다들 아픈 건데, 유난떨기는 싫어요. 같이 들어요.”

“우리 아들, 서울말 자알한다, 잘한다. 그래, 같이 들자. 다 컸네, 울 아들.”

말뚝을 경운기에 모두 옮겨 싣고, 태수는 아버지를 따라 흙 묻은 검은 비닐 뭉치를 밭 귀퉁이 한 곳으로 들어 옮겼다. 아버지가 담뱃불을 붙이고는 켜켜이 쌓인 비닐 뭉치 아래에 불을 놓았다. 시커먼 비닐이 불붙은 물방울처럼 뚝 뚝 떨어지더니 이내 매캐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태수는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방향을 옮기며 손바닥으로 온기를 더듬었다. 두 번째 꽁초가 불더미에 던져지고 둘은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둘은 아궁이에서 끓는 물을 길러다 세안을 하고 수건을 적셔 몸 곳곳을 꼼꼼하게 몸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길러 쓴 물 보다 더 많은 찬 물을 길어 솥을 채우는 일은 태수의 몫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타닥타닥 붉게, 희게, 노랗게 타들어가는 나무를 쪼그려 앉아 구경하던 중에 음식냄새가 코를 간지럽힐 즈음에서야 태수는 방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김칫국에 든 커다란 멸치가 입안에서 질기지 않게 바스러지고 칼칼한 국물은 밥알을 풀어헤쳐 저절로 목으로 넘어가게 했다. 이따금 젓가락이 허전하면 이기 시리게 차가운 동치미나 무말랭이를 맛있게 집어먹었다. 그러다 태수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태수야. 니 영어 좀 아나? 에이비씨디 말이다.”

“알파벳 영어야 노래로 외우지요.”

“읽고 쓸 줄도 아나?”

“대문자는 다 아는데 소문자는 잘 몰라요. 괜찮아요. 학교에서는 영어 안 배우니까요.”

“내년이면 니도 중학생인데, 영어 배우겠네.”

“예. 그렇지요.”

“공부 열심히 해라이. 중학교 가기 전에 대문자 하고 소문자하고 다 외워야 된다이.”

“예, 아버지.”

태수는 다음날에도 아버지를 따라 또 다른 과수원과 고추밭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고랑 끝에서 검은 비닐을 끌어당기다가 자꾸만 찢어져서 끊어진 곳까지 다서 다시 잡아당기기를 반복했지만 이제는 요령이 생겨 힘을 덜 들이고도 더 빠르게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냇물과 맞닿는 가장자리 한 구석에서 고추줄기에 불을 놓던 아버지에게 태수가 말했다.

“아버지, 저는 공부 못하면 아버지 따라서 농사나 지으려고요.”

평온하던 얼굴에 불 같은 화가 일며 아버지가 호통쳤다.

“이 새끼가… 무슨!”

태수는 혼이 나서 주눅이 들기 보다도 쩌렁쩌렁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밭을 둘러싼 산에 메아리치는 통에 적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을 멈추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걸음 하자,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태연히 비닐을 연신 당겼다. 아버지의 작업화 두 개가 아들의 눈에 들어왔다.

“아부지가 욕해가 미안타. 개안체?”

“예… 다시는 농사짓는다는 말은 안 할게요.”

“그래, 니는 꼭 도시서 성공해가 보란 듯이 하얀 와이샤스 입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숩게 일해야 한다. 인자, 다시는 방학이라고 불러가 일 안시키꾸마. 대신에 니 공부 진짜로 열심히 해야한데이.”

훈계조의 목소리가 푸념하듯 바뀌더니, 말이 끝날 즈음에는 푸근해졌다. 태수는 조금 전의 말을 똑같이 반복하려다 그냥 짧게 예, 아버지, 하고 말았다. 비닐이 불타며 뿜는 탁한 연기는 높이 오르지 못하고 안개처럼 산으로 숲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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