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 12
아침 조회가 끝나고도 교실은 비에 젖은 천처럼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건조해서 공기 중의 분필가루가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볕에 반사되며 분분히 빛났다. 칠판에 쓰였던 지식이 낳은 분필가루는, 밝디 밝은 빛이 허공에 그어 놓은 경계선 속에서 언제까지나 안전하게 머물 것만 같았지만 여닫히는 문으로 스미는 바람에도, 아이들의 작은 손짓에도 흩어지고 스러졌다. 먼지가 사라지자 햇볕의 빛줄기도 그 경계선을 잃고 말았다. 진아는 결코 길지 않은 일련의 과정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반장 민지가 건넸을 결석자 명단을 받아 든 담임이 교실로 들어와 날짜를 칠판에 적으며 말했다.
"수학여행비 안내장 받았지? 다음 주 까지야."
주번이 깨끗하게 지워둔 칠판에 하얀색으로 날짜가 또박또박 남았다. 진아는 생각했다. 저 숫자도 머지않아 먼지가 된다. 빛 속에서 반짝이든지, 바닥으로 가라앉던지.
불현듯, 다음 주,라는 말이 마치 돌처럼 탁 떨어져 바닥에 멈췄다. 담임은 말끝을 흐리더니 교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혹시,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 친구들은 미리 선생님한테 말해. 알았지?"
그 말에 교실은 더 조용해졌다. 뒤쪽에서 누가 연필을 떨어뜨렸는데도,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진아는 자기 교과서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얇은 종이의 미세한 결이 손끝에 닿았다. '가지 않는 친구'라는 말은 곧 '갈 수 없는 친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진아는 그 전제를 오늘에야 처음으로 피부로 느꼈다.
쉬는 시간에 혜진이 자리에 앉아 필통을 여닫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 다음 달에는 미술학원 안 다니게 됐어."
"왜?"
"엄마가 좀 쉬라고 하셔. 선생님이 그러는데 이번 달에 나 같은 애들이 많대."
혜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얇았다. 사실은 '쉬는 것'이 아니라 '그만두는 것'이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진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창밖을 보았다. 운동장 구석에는 지난 체육시간에 쓰고 남은 플라스틱 원반과 공이 쌓여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마치 쓸모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정리하고 급식실에 내려가는데, 구석에서 선생님이 몇몇 친구를 따로 불러 세우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이번 달은 학교에서 처리했으니까, 부모님께 말씀드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에서 들은 '가지 않는 친구'라는 말이, 점심식사를 앞두고 다시 되풀이되고 있었다. 급식은 모두가 함께 먹었지만, 낼 수 있는 집과 내지 않은 집이 은근히 갈라지는 기류가 생겨나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불려 갔다가 늦게야 급식 줄에 선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그런 축에 속하지 않음을 서로에게 인증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아이들은 간격을 좁혀가며 앞으로 앞으로 서둘러 줄을 섰다. 진아는 식판을 들고 줄을 서면서, 보이지 않는 구분선을 뚜렷하게 보았다. 옆으로 이동하며 식판을 내미는데 조리사 아주머니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밥 조금? 많이?"
"보통이요."
밥 한 주걱이 덜어지는 소리에 맞춰, 진아는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맨 뒷줄에 하준이 쭈뼛거리며 줄을 서는 게 보였다. 오늘도 밥은 받을 수 있었지만, 다음 달에도 똑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듯이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하굣길에 교문 앞에서 학부형 몇몇이 모여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옷소매를 쥐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얼굴들이었다.
"요즘 댁은 좀 어떠세요."
"버티고 있죠. 그러고 보니 학교 앞에선 오랜만에 봬요. 도우미 아주머니는…"
“네, 저도요.”
"아이 학원은…"
말끝이 기어들어가 사라졌다. 담임이 그 사이를 지나가며 짧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들.” 하자, 교문 앞에 서있던 엄마들이 일제히 담임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으십니다, 선생님."
그 말은 서로의 어깨에 올려진 보이지 않는 짐의 무게를 잠시 확인하는 의식 같았다. 지금까지 고생이라는 단어는 결코 그녀들의 것이 아니었으나, 어쩌면 미구에 본인들에게 덮쳐올 수도 있는 것으로 그 거리가 좁혀지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진아에게도 변화는 찾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최기사님, 김기사님, 아니면 가사도우미 이모님이 교문 바로 앞까지 마중을 나왔었지만, 이제는 학교 담장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사거리에서나 마중 나온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학교 앞까지 마중 나가지는 못하도록 지숙이 기사들과 도우미에게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김기사가 마중을 나와있었고, 차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진아를 보고는 황급히 발로 비벼 끄고 있었다. 진아는,
“못 본 걸로, 맞죠?”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집에 돌아오니 현관에는 택배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지숙이 거실 소파에서 말했다.
"아빠가 주문한 거야. 기왕에 들었으니, 서재에 갖다 두련."
"네."
진아는 가방과 택배상자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그녀의 식도를 넘어가는 물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물을 반쯤 마시고 컵을 밀어놓고 나서는 수학여행비와 급식비, 학교운영지원비의 납부 안내서를 가방에서 꺼내어 다이닝룸 식탁 위에 가지런히 포개어 올렸다. 종이와 종이 사이에는 공기가 있지만, 결국은 같은 묶음이 되었다. 결코 진아 스스로에게 고민이 되거나 짐이 되지 않을, 일상적인 묶음이기를 그녀는 확신했다.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가사도우미가 전화를 받았고, 곧 수화기를 들고 지숙에게 가져왔다.
"여보세요… 응, 언니. … 아니, 우리도 힘들어. 재후 씨도 요즘 고생이 많아. 요즘 잘되는 집이 어디 있어… 응, 이번 달은 내가 알아서… 그래, 알았어."
지숙이 수화기를 식탁 모퉁이에 탁 하고 내려놓자, 기다리고 있던 가사도우미가 귀한 물건을 다루듯이 두 손으로 챙겨 들고 느린 걸음으로 돌아갔다. 지숙은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렀다. 진아는 밥숟가락을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우리도 힘들어?"
"다들 힘들지. 너희 아빠도 바빠."
"…근데 아빠 회사는 괜찮아? 그러고 보니까 아빠 얼굴을 예전보다 더 못 보는 것 같아."
"괜찮지. 괜찮지 말고. 바빠서 그런 거야. 밤낮없이 바쁘셔.”
“그런데 방금 이모한테는…….
“그건… 그래. 그렇지만, 남들한테 자랑할 순 없잖아? 미리 말해줄 걸 그랬네. 진아야, 이건 나쁜 거짓말이 아니야."
지숙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아의 마음속에는 묘한 혼란이 남았다. 정말 우리 집은 괜찮은 건지, 아니면 엄마가 언니에게 한 말처럼 사실은 힘든 건지. 엄마가 거짓말을 한 대상은 이모 일까, 아니면 나일까,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집 안 공기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식탁 위에 놓인 안내장을 눈길로 흘겨보다가, 지숙이 무심하게 물었다.
"진아야."
"응?"
"수학여행, 가고 싶지?"
"네."
"그래. 가야지. 가는 친구들이 더 많지? 그렇지?"
“그건 몰라. 다음 주까지 제출이니까.”
그러나 진아는 어제의 약속이 오늘의 약속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의 그 말이 좋았다. 말은 때로 다리가 되어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으로도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다리. 수학여행을 가능성이 아니라 정해진 일정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튼튼한 다리.
식사가 끝나고,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용함은 벽처럼 단단하기도 했고, 담요처럼 부드럽게 어깨를 덮어주기도 했다. 다행히 오늘은 담요에 가까운 조용함이었다.
주방에서는 늘 그렇듯 가사도우미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진아는 별 뜻 없이 주방 앞을 걸어 지나갔다. 오늘따라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정중하게 들렸다.
"진아 양, 필요한 건 없어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겨울방학까지 만해도 "진아야"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진아 양'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최근 들어 가사도우미들 사이에서는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늘어났고, 누구나 그 집 사장의 사업이 무탈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안하면 사장네 식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밉보이고,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은 법이었다. 진아도 그런 기미를 조금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 변화는 진아에게 낯설었지만 동시에, 몸도 마음도 조금씩 어른의 그것과 닮아가는 만큼 대우도 바뀌는 것 이려니 하고 적잖이 으쓱하기도 했다. 진아는 가볍게 인사만 하고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싱크대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오래 남았다.
방에 들어와 책가방을 열고 교과서와 공책 따위를 꺼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종이의 모서리를 맞추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혜진의 말이 되짚어졌다. '쉬었다가'라는 말. 쉬는 건 멈추는 것과 다르다고, 어른들은 종종 말한다. 하지만 아이의 시간에는 멈춘 것과 쉰 것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다시 시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직 감당할 말이 없어서, 쉬는 것을 쉬는 채로 믿어야만 할 때.
숙제를 하다가 가끔 공책에서 눈을 떼면, 아래층 거실에서 뉴스 소리가 흘러왔다. 앵커는 "인원 감축, 고용불안, 부동산 폭락" 등의 단어들이 섞인 어려운 문장을 연이어 말하고 있었다.
밤에 잠들기 전, 진아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커튼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쉬는 것과 그만두는 것 사이에는 얇은 선이 있었다. 그 선은 눈을 감으면 더 얇아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선은 언제나 어디엔가 있었다. 그리고 진아는 그 선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 발끝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