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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그와 일요일의 그녀

진아 10

by 융 Jung

진아 10

아직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십일월의 어느 금요일 밤, 진아는 책상에 엎드려 색연필을 고르고 있었다. 흰 도화지 위에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진아는 그것을 하루의 시간표처럼 스물네 칸으로 나누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는 시간, 점심 무렵에 숙제를 하는 시간,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만화를 보는 시간,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하나하나 나누어 색연필로 칸을 채워 넣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스스로 정리하는 일은 진아에게 놀이 같기도 하고 약속 같기도 했다. 동그란 원 안이 알록달록 채워질수록 마음은 뿌듯해졌고, 다가올 방학이 마치 선물처럼 반짝여 보였다.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며 어두운 골목을 비추고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울릴 때마다 방 안의 따뜻한 공기가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때,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목소리에 진아의 손에서 색연필이 덜컥 떨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엄마의 잔소리나 텔레비전 소리쯤이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낮게 깔린 아빠의 목소리,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한숨, 그리고 그 뒤에 섞인 엄마의 웅얼거림은 평소와 달리 무겁고 심각했다. 진아는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넓은 집에 크게 울려 퍼졌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아빠 재후는 전화기를 손에 꽉 쥔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지도, 평소처럼 담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말끝마다 불안이 묻어났다. 소파에 앉은 지숙은 두 팔을 꼬아 안은 채 한 손으로 손톱을 뜯고 있었다. 진아가 오래전부터 봐온, 엄마의 오랜 습관이었다. 불안하거나 긴장할 때면 입가로 손을 가져가 앞니로 손톱을 물어뜯는 것이었다. 언제나 진아가 나타나면 황급히 손을 떼곤 했지만, 그날 밤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지숙은 딸이 내려온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니로 손톱을 깊게 깨물고 있었다.
 진아와 눈이 마주치자 지숙은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이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고, 손끝은 벌써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뒤, 재후가 전화를 끊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아내를 향해 짧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려나 봐. 여보, 얼른 뉴스 좀 틀어봐. 빨리.”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대체…”
 “아, 얼른!”
 재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아졌다. 딸 앞에서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던 남편이었기에 지숙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낯선 긴장감이 집안에 흘렀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붉은 자막이 깜박이며 긴급 속보가 떠올랐다.
 “한국 정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요청 결정.”
 앵커는 단호한 목소리로 상황을 반복 설명했고, 패널로 나온 경제학자들은 모두 잿빛 얼굴로 ‘전례 없는 위기’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몇 분 간격으로 같은 문장이 흘러나왔고, 집안의 공기는 금세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숙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남편의 반응을 살피느라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궁금증을 억눌렀다. 그때 진아가 아빠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작은 손끝의 온기가 전해지자 재후의 떨리던 호흡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빠, 우리나라 무슨 큰일 난 거야?”
 순진한 물음에 재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답했다.
 “우리 진아가 기억은 못하겠지만, 큰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크게 흔들렸었다는 얘기, 망할 뻔했었다는 얘기는 들었지? 사업이 망하는 걸 부도라고 해. 지금 우리나라가 그래.”
 “안 좋은 거네. 그럼 우리 집도 어려워져? 아빠 사업도 망하는 거야?”
 “그럴 리 없지. 아빠는 제법 똑똑하잖아. 문제없어. 하지만 주변에는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야. 아빠 주변에도, 엄마 주변에도, 우리 진아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은 괜찮으니까, 아빠가 도와주면 안 돼?”
 순수한 눈빛으로 묻는 딸의 말에 재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내 애써 미소를 지우고 차분히 설명했다.
 “우리 진아가 마음이 참 넓구나.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단다. 아무리 커다란 그릇에 사료를 담아 내놔도 수백 수천 마리까지는커녕, 고작 몇 마리의 강아지만 먹일 수 있잖아. 다 먹일 수는 없어. 이해하겠니?”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이해했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올라왔다. 자동차를 오래 타고 있을 때와 비슷한 멀미가 명치에서 느껴져 입을 앙다물어야 했다. 어린 마음에도 어른들의 세계에 금이 간 듯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집안 풍경은 빠르게 변해갔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드라마나 퀴즈쇼를 보며 웃음소리를 내곤 했지만, 이제는 뉴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화면 속 기자들은 매일같이 ‘대기업 구조조정’, ‘해고’라는 단어를 내뱉었고, 어제는 성실히 일하던 사람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이, 오늘은 또 다른 회사에서 곧 사람들을 내보낼 거라는 소식이 이어졌다.
 탓할 사람을 찾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진아에게 익숙했지만, 양복 차림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아저씨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출근하는 것처럼 구두를 신고 나서면서도 정작 갈 곳은 없는 가장들. 가족들에게 해고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한 채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뉴스 화면은 그런 뒷모습을 클로즈업했고, 진아는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며칠 뒤, 첫눈이 내렸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던 남자의 굽은 어깨가 화면에 잡혔다. 그 초라한 모습은 진아의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곧, 진아의 5학년 2학기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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