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10
5학년 2학기부터 따돌림은 더 이상 말이나 눈초리로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손과 발이 노골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그 집중된 폭력의 화살은 언제나 태수에게로 향했다. 교실 안팎의 공기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아이들의 날 선 감정으로 뒤섞여 있었다. 여학생들 중 일부는 이미 브래지어를 착용하며 가슴이 봉긋하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남학생들은 콧잔등의 솜털이 거뭇해지며 수염으로 변해가고 목소리가 갈라져 굵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몸과 마음의 불안정은 늘 새로운 표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태수는 가장 쉽게, 그리고 마음 편히 겨눌 수 있는 과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장난의 연장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힘을 확인하는 수단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심심풀이였다. 이유는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태수는 언제나 맞아도 되는 아이, 욕을 들어도 되는 아이였다.
그날은 여느 금요일처럼 평범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평범함은 곧 재웅의 입에서 떨어지는 한 마디로 산산조각이 났다. 같은 반, 같은 분단에 앉은 재웅은 아침 조회가 끝나자마자 의자에 반쯤 걸터앉은 채 태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교실 소음을 뚫고 조용하게, 하지만 선명하게 태수의 귀를 찔렀다.
“야, 태수. 오늘은 임무 있어.”
‘임무’라는 단어는 언제나 태수의 심장을 먼저 조여 왔다. 거절하면 맞아야 했고, 순순히 받아들여도 결국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첫 번째 임무는 백 미터 달리기를 이십 초 안에 완주하는 것이었다. 체육 시간에 이미 십구 초를 기록했던 터라 태수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아이들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달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러나 재웅이 들이민 최신형 디지털 손목시계의 화면에는 선명하게 “21.0”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봤지? 이십 초 넘었네. 꽝이다, 꽝.”
재웅은 킬킬 웃으며 주위 아이들에게 결과를 보여주듯 손목을 흔들었다. 태수는 억울했다. 자신이 분명히 기준을 통과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반박하는 순간 더 큰 놀림감이 될 뿐이라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억울함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점심시간 급식이 끝나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운동장으로 흩어지거나 교실 뒷자리에 모여 앉아 과자를 나눠 먹는 와중에도 재웅은 태수를 불러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위험한 임무였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란색 색소사탕을 훔쳐 오라는 것이었다. 태수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돈 내고 사면 죽는다. 훔치라 했다, 분명히.”
재웅은 방금 전까지 웃음을 흘리던 얼굴을 삽시간에 굳혔다. 눈동자에는 장난이 아닌 섬뜩한 기세가 서려 있었고, 그는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태수의 두 눈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태수는 숨이 막혀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눈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도, 눈길을 피할 만큼의 용기도 나지는 않았다.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태수의 어깨를 재웅이 다시 붙잡았다.
“조건 하나 더. 내가 끝까지 지켜본다. 대신에 나하고 눈 마주치면 죽는다. 뒤돌아보기만 해 봐, 아주.”
말은 농담 같았으나 목소리는 무겁고 단호했다.
태수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차라리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터지면 재웅의 주먹이 몸 어딘가로 날아들 게 뻔했다. 교실 한가운데서 “울보 촌놈”이라는 조롱이 쏟아지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반장 호영에게 시선을 보냈다. 재웅과 사이가 나빴던 호영이라면 혹시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영은 태수의 떨리는 눈빛을 애써 모른 척했다. 칠판에 적힌 수업 시간표를 괜히 훑어보며 외면해 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 태수는 미약하게나마 걸었던 희망을 잃었다. 발로 옆구리를 세게 걷어차이는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순간 숨이 턱 막혔지만, 그 고통은 그저 출발 신호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내달렸다.
교실 문을 박차고 나와 긴 복도를 뛰어가는 동안 그의 귀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야유가 따라붙었다. 운동장 쪽으로 시선을 한 번도 주지 못한 채, 그저 발만 굴리며 달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사탕을 가져오려면 아침에 달릴 때보다 더 빨라야 했다. 숨이 차올라 목이 타들어 갔고, 교문을 빠져나갈 즈음에는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문구점이 보일 때쯤, 그는 이미 콧물과 침, 그리고 눈물이 한데 엉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목숨 걸 듯 달려야 하는 걸까.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억울함이 속에서 치밀어 올라 목구멍을 조였다. 허리를 숙여 무릎에 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는 순간, 문득 머리에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다. ‘뒤를 보면 안 된다 했지… 그래도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는 몸을 더 깊이 숙여 자신이 달려온 길을 두 다리 사이로 곁눈질했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웅은 따라오지 않았다.
안도의 숨이 절로 터졌다. 가슴속에 돌덩이 같은 무게가 잠시나마 내려앉았다. ‘다행이다. 사탕은 그냥 돈 주고 사면 돼. 훔치지 않아도 된다.’ 눈물로 젖은 뺨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친 그는 용기를 내어 문구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이 계산대 뒤에서 신문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수는 곧장 진열대에서 파란색 색소사탕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주머니를 뒤적이는 순간, 그의 눈앞은 순식간에 하얘졌다. 동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에서 방금 전 달려온 길을 거꾸로 재생했다. 교실에서 뛰쳐나올 때,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교문을 빠져나올 때… 주머니 속 동전이 짤랑거린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 소리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분명 아침에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동전이 있었는데.
“왜, 돈이 없니?”
사장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태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네, 아침까지는 있었는데… 분명히 있었는데요……”
사장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까짓 사탕 하나를 못 산다고 사내가 울고 그러면 어쩌니. 오륙 학년은 돼 보이는 다 큰 녀석이.”
태수는 눈가가 붉게 물들며 애원하듯 소리쳤다.
“사야 해요. 안 그러면 저… 저 죽어요.”
그 한마디에 사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아이의 몰골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먼지로 얼룩진 무릎, 그리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 무슨 사정이 있는지 짐작이 가는 듯했다. 태수는 급히 덧붙였다.
“아주머니, 외상은 안 될까요? 저 여기 학교 다녀요. 5학년 13반 정태수예요. 내일 꼭 돈 가지고 올게요. 그러면 안 될까요?”
잠시의 정적 끝에 사장은 천천히 손을 뻗어 사탕을 태수의 손에 쥐여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엄하지만, 그 속에는 연민이 배어 있었다.
“돈은 됐어. 대신 딱 이번 한 번 만이야. 알았지? 점심시간 다 돼 간다. 얼른 가봐.”
태수는 사탕을 손에 꼭 쥔 채 허리를 깊이 숙였다.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내뱉었다. 문을 박차고 나오자 여름 햇볕이 그의 얼굴을 후끈 달궜다. 다시 교문을 향해 달리는 발걸음은 무겁고도 간절했다.
교문이 보일 무렵, 수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요란한 음악이 태수의 가슴을 다시 옥죄었다. ‘늦었다. 재웅은 뭐라고 할까. 아이들은 또 뭐라고 할까.’ 두려움이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는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