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09
여름 방학의 시골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노동으로 시작되었다. 해가 산등성이를 넘기도 전, 마당에는 경운기를 깨우는 쇳소리가 울렸다. 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뒤 낡은 경운기 앞쪽에 달린 시동 크랭크를 움켜쥐었다. 두 손으로 힘껏 돌리자, 쇳덩어리 같은 기계가 쉰 듯한 기침 소리를 토하며 덜컹거리며 깨어났다. 태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장화를 먼저 꿰어 신었다. 장화를 신는 순간부터 하루는 이미 일터와 다름없었다.
새벽에는 논에 나가 농약을 뿌렸다. 물안개가 걷히기도 전, 논바닥에는 흰 연무 같은 농약 안개가 퍼져 나갔다. 태수는 아버지가 어깨에 돌려멘 농약 호스가 쳐져서 벼를 쓸지 않도록 팽팽하게 줄을 잡고 멀찌감치서 따라다녔다. 손바닥은 금세 젖고, 장갑은 흙과 농약 냄새로 눅눅해졌다. 잠시라도 힘이 빠지면 줄이 논둑에 끌려가 꼬여 버렸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왔다.
“태수야, 똑바로 잡아라! 졸린 눈은 집에서 붙이고, 논에 나왔으면 눈 똑바로 뜨야지.”
“예….”
짧게 대답했지만 속은 분했다. 아직 열 살 갓 넘은 몸으로는 벅찬 일이었지만, 논에서는 애라고 봐주는 구석이 없었다.
농약통이 바닥을 보이면 일을 접었다. 바로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길로 과수원이나 고추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논에서는 손을 댈 수 없으니, 다른 밭에서 김을 매거나 고랑을 정리해야 했다. 작은 고추밭 하나쯤은 금세 끝날 것 같았지만, 태수가 일어섰다 앉았다를 수십 번 반복할 때쯤이면 허벅지가 터질 듯,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머리에서는 현기증이 났다. 사과나무의 높고 낮은 곳에서 적과를 할 때에는 이슬을 머금은 이파리가 눈알을 스쳐 땀과 눈물이 섞여서 흘렀다. 그럴 때마다 태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우리 집은 땅이 이리 자잘 자잘 흩어져 있을까. 모아 있으면 좀 수월할 텐데….’ 땅이 작은 데다 흩어져 있다 보니, 경운기를 타고 옮겨 다니는 시간만 해도 노동 못지않게 힘들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집으로 돌아왔다. 대청마루에는 이미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고, 그것은 온전히 할머니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밥을 다 차린 뒤에도 할머니는 한마디를 빼먹지 않았다.
“이 집구석은 내가 밥 안 하면 굶어 죽을 끼다. 며느리는 찬거리 한 번 변변히 내는 걸 못 하고.”
영민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숟가락만 들었다. 밥상을 치우고 부엌 뒷정리를 하는 것도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태수는 허겁지겁 밥을 퍼 넣으면서도 눈치를 살폈다. 상 위의 김치며 나물은 어머니가 아침부터 다듬고 삶아낸 것들이 분명했지만,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건 타박뿐이었다.
배가 부르면 곧 잠이 쏟아졌다. 마루 끝에 대충 베개를 베고 드러누우면 파리 날갯짓 소리와 매미 울음이 한데 섞여 귀를 때렸다. 태수는 이불도 덮지 않고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는 종종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웃음이 났다. 비가 오면 일을 쉬어도 된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뙤약볕만 내리쬔다면, 그만큼 더 허무했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밭으로 나가야 했다. 오후의 해는 아침보다 훨씬 독했다. 등에 내리 꽂히는 햇살에 눈앞이 아득해질 때도 많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해 묵자. 해 지기 전에는 한 줄이라도 더 매야 쓰겄다.”
“예….”
태수는 힘이 빠져도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발뒤꿈치는 장화에 쓸려 벌겋게 헐어 있었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 상은 다시 할머니의 손으로 차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영민이 낮잠에서 일찍 일어나 준비해 둔 찬거리였다. 할머니는 그저 상을 내놓으며 생색을 냈다.
“에그, 이 집은 찬이 와 이래 부실하노. 며느리가 아무리 무능해도 그렇지.”
영민은 애써 웃으며 “예, 어머님” 하고만 대답했다. 태수는 밥을 씹으며 속이 부글거렸다. 하루 종일 어머니가 논밭에서 흘린 땀을 아는데, 왜 할머니는 그걸 모른 척하는 걸까.
그렇게 흘러간 방학도 어느덧 끝이 보였다. 개학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태수는 방학 숙제를 핑계로 하루 이틀 농사일에서 빠질 수 있었다. 공책 위에 글자를 눌러쓰며 잠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문제는 숙제 그 자체였다. 글짓기를 하려 해도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종이를 구겨 버리기를 반복했고, 수학 문제는 계산이 틀려도 답칸을 비울 수 없어 억지로 숫자를 끼워 맞췄다. 실험 과제는 ‘어른의 도움을 받아 기록하라’는 항목이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질문을 적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으로 채웠다. 억지로 종이를 채워나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학교 가면 또 애들이 촌놈이라고 놀리겠지, 때리겠지. 나는 또 등신같이 맞겠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은 금세 다가왔다. 할머니가 보자기에 옷을 싸고, 어머니는 도시락을 챙겼다. 아버지는 고속버스와 열차표를 내밀며 짧게 말했다.
“서울 올라가가 공부 똑바로 해라.”
태수는 예 아버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 창밖으로 논과 밭, 산자락이 흘러 멀어졌다. 그 풍경은 고된 노동으로 지겹기도 했지만, 따돌림 없는 유일한 세상이기도 했다. 대구에서 열차로 갈아탔을 때 그는 무언가 체념을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체념하는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열차 창밖으로 도시의 회색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태수는 숨이 막혔다. 반지하의 눅눅한 냄새, 아이들의 조롱 섞인 웃음, “촌놈”이라 불리던 기억이 선명하게 겹쳐졌다. 그는 두 손을 꼭 움켜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가는 거구나. 그 지옥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