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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그와 일요일의 그녀

진아 08

by 융 Jung

진아 08

 진아가 미국에서의 여름방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토요일 밤, 그녀의 방 문이 조용히 열렸다. 노크 소리도 없이 살며시 들어온 엄마 지숙은 미등만 켜진 어두운 방 안에서, 침대에 책을 펼쳐 들고 있던 진아의 곁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차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듯, 손끝으로 침대보의 자잘한 무늬를 쓰다듬던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진아야…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말끝은 낮고 부드러웠지만, 방 안의 공기를 가르며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진아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너무 어려 그 일을 기억하지도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제는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이별임을 알아버린 나이였다.

 진아에게 할머니는 단순한 가족의 한 어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내내 자신을 품어주고 길러준 또 하나의 보호자였다. 엄마가 바쁠 때면 늘 손을 잡아주었고, 감기에 걸려 누워 있을 때는 등을 쓸어주며 “괜찮다”는 말을 반복해 주던 사람이었다. 실버타운으로 들어가신 뒤에도 진아는 시간을 내어 자주 찾아갔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직접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 주셨다. 실버타운은 마치 긴 여행길에 묵던 호텔처럼 깔끔하고 화사했으며, 직원들은 고급 호텔리어처럼 정제된 미소를 띠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입주 노인들을 모셨다. 진아는 어린 눈에도 그곳이 마냥 낯설지 않고 오히려 안락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늘 존칭을 사용하며 직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할머니의 품위 있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받아들이는 직원들의 태도 속에서 진아는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종류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그 순간에는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남편을 먼저 장례식장으로 보낸 지숙은 집에 홀로 남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시름이 깊어 잠들 수가 없었고, 겨우 눈을 붙였다가도 곧 깨어났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와, 복도 끝에서 스며드는 시계 초침 소리까지도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결국 알람이 울리기 훨씬 전, 희미한 새벽빛이 번져오기 시작하던 시각에 그녀는 일어났다. 욕실의 불을 켜자 차가운 거울 속에서 수척한 얼굴이 비쳤고, 그녀는 더운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하며 묵직하게 쌓여 있던 피로와 슬픔을 조금이나마 씻어내려 했다.

 머리를 말리고 나와 가볍게 화장을 했다. 진한 색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소박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인상을 아주버님과 형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옷방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검은색 투피스 정장 두 벌을 나란히 걸어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얇은 여름용은 요즘 같은 눅눅한 공기에 맞았지만, 어쩐지 단정함이 부족해 보였다. 가을용은 소재가 두터워 조금 덥겠지만 장례식장의 분위기에는 더 어울릴 듯싶었다. 옷걸이를 집어 드는 순간, 머릿속에 “곧 쇼핑을 나가야겠네”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스스로의 경박함을 자책하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한 치의 가벼움도 허락되지 않는 날이었다.

 일 층으로 내려가자 진아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반듯하게 빗어 내렸고, 흰 머리띠가 그 위에 얌전하게 자리했다. 아직 아침 햇살이 채 집 안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아이의 표정에는 묘한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따끈한 수프와 샐러드, 구운 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서 가사도우미가 서둘러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잘 골라 입혔네요. 잘 잤니, 진아야?”
 지숙은 피곤이 덜 가신 목소리로 둘에게 동시에 말을 건넸다.

 “다 사모님이 준비성이 좋은 덕분이죠. 사모님 아침도 곧 올려 드릴까요?”
 가사도우미가 환하게 대답했다.

 “응, 잘 잤어. 엄마는 좀 피곤해 보여.”
 진아도 곧장 엄마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지숙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사도우미에게는 두 눈을 감은 채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고, 그러나 곧 고개를 살짝 저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 먹으면 양치하고 와. 엄만 여기서 기다릴게.”
 진아는 짧게 “응” 하고 답한 뒤 다시 샐러드에 젓가락을 옮겼다.

 잠시 후, 가사도우미가 주방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지숙에게 다가왔다. 진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은 최기사가 나와 있어요. 십 분쯤 전에 도착해서 대기 중이랍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이 어디인지 묻더군요. 간밤에 사장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셔서, 저도 모른다고만 했습니다.”

 지숙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왜 그걸 미리 최기사한테 보고해야 할까요, 이모님?”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네요. 출발하시기 전에 따뜻한 차라도 내드릴까요, 사모님?”

능숙하게 화제를 바꾸면서도 사과를 잊지 않는 가사도우미를 향해 지숙은 피식 웃으며, 약간의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헀다.

“그러니까, 왜 착한 사람을 괜히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걸까, 정말.”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에스프레소 한 잔 주세요. 그리고 제 텀블러에는 진토닉, 진은 연하게 타주세요. 진아 텀블러에는 레모네이드로 부탁할게요.”

가사도우미는 고개를 숙이며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숙은 창문 너머로 점점 밝아지는 하늘빛을 힐끗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고 버거울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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