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 08
여름 방학이 되고, 태수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1톤 화물차를 몰고 왔다. 간소하게 꾸린 할머니와 태수의 짐을 짐칸에 싣고, 태수가 차에 먼저 올랐다. 아버지가 가운데 좌석을 젖혔고, 태수는 좁은 뒷칸으로 기어들어갔다. 젖혔던 가운데 좌석이 세워지자 어머니 영민이 어깨를 움츠리며 올랐고, 할머니가 못마땅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았다. 할머니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푸듯이 말했다.
“이, 이 좁은 차에, 야는 만다꼬 따라와가 우리 장손을 짐짝같이 앉히게 만드는공, 응? 기왕에 올 거면 그 살이라도 좀 빼가지고서는 지가 의자 뒤로 들어가지 않고. 서울을 그리 구경하고 싶었는강. 에휴, 늙으면 얼른 죽어 삐야지.”
아버지는 미구에 언성이 높아질 것을 직감하고는,
“어머니, 거 모처럼 만나서 언성 높이지 마십시다. 제가 따블포터를 샀어야 하는 건데. 태수 애미 나무라지 마이소.”
하였지만 이미 늦은 듯 영민이 입을 열었다.
“태수 아부지예, 아이고 마, 아입니더. 어머님 말씀 하안나도 틀린 거 없습니더. 제가 죽일 년이지예. 어머님예, 지성합니더. 제가 돼지거치 살만 디룩디룩 쪄싸가꼬예. 내가 우짜자꼬 여를 따라왔을까, 여를. 하이고.”
“잘 아네. 알기는 알아, 응.”
“내 다시는 안 따라 올라니까네 아들 혼자 졸음운전을 하든동 말든동 마 알아서 하라카이소. 저는 뭐 따라오고 싶어가 오는 줄 아닝교. 내가 일부러 올라꼬 베르고 벨라가 온 줄 아시네예. 우리가 빈 차로 올라온 줄 아시지예? 어데요, 아입니더. 사과하고 고추에 쌀에 한 차 싣고 왔었니더. 그거 다 우쨌는 줄 아시닝교? 어머님 따님네 가가지고는 마, 거의 거저로 다 주고 왔다 아입니꺼. 태수 아빠, 당신도 이래 가만히 있는 거 아입니더.”
“여자 하나 잘 못 들이면 집안이 망한다 캤다. 우예된기 어른한테 한 마디를 안 진다, 한 마디를.”
“이 사람 어허, 고마해라. 거 어머니도요. 다 큰 아가 듣는데, 예? 당신은 거 기아봉 움직이구로 다리 좀 치아봐라.”
태수는 말이 없었다. 그저 할머니가 어서 잠들기를 바랐고, 어머니의 다리가 기어봉에 닿지 않기를 바랐고, 아버지가 담배를 덜 피우기를 바랐다. 조수석 문으로 올라탄 탓에 별 뜻 없이 상체를 운전석 뒤로 한 다음 조수석 뒤로 다리를 폈을 뿐인데, 태수는 한참을 후회했다. 담배 연기뿐만이 아니라 이따금씩은 담뱃재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트럭은 금강휴게소에 멈춰 섰다. 엔진 소리가 꺼지고 문이 열리자마자, 태수는 잔뜩 굳어 있던 무릎과 허리를 펴며 힘겹게 바깥으로 나왔다. 아스팔트 바닥은 슬리퍼를 녹일 듯 뜨거웠지만, 오랜만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그는 요의를 느끼지 않았으므로 화장실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두 팔을 크게 벌려 기지개를 켜기도 하며 학교에서 배운 갖가지 동작으로 뭉친 근육을 풀었다.
그때 태수네 트럭 옆으로 노란색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왔다. 마치 장난감 자동차를 커다랗게 확대해 놓은 듯 번쩍이는 차였다. 묵직한 배기음이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끌었다. 차 문이 열리자 태수 또래의 여자아이와, 아마도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내렸다. 아이는 반짝이는 샌들을 신고 있었고, 머리에는 작고 화려한 머리핀들이 몇 개 꽂혀 있었다.
잠시 후, 담배를 입에 문 아버지가 걸어왔고, 어머니와 할머니가 옥신각신하면서도 나란히 트럭 쪽으로 다가왔다. 태수는 몸을 숙이고 반으로 접혀 있던 가운데 의자를 기어 다시 좌석 뒷칸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창밖에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네 사람이 어떻게 그 좁은 차에 다 탈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 하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아직도 한 사람이 더 탈 수도 있다는 걸 태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뒷칸에 한 사람이 더 타면 서로 굽힌 무릎을 맞대어서 오히려 균형이 잘 잡히는 장점도 있었다. 저런 멋진 차를 타고 다니니 세상 물정을 알 리가 있나, 흥, 하고 태수는 생각했다.
트럭은 다시 길을 나섰고, 긴 여정을 거쳐 시골에 도착한 것은 저녁 여섯 시 무렵이었다. 해는 서쪽 논두렁 너머로 기울고 있었고, 들판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집 앞마당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손을 흔들며 반겼다. 할아버지는 태수를 껴안듯 맞아주었고, 오랜만에 보는 할멈에게 수고했노라고 마지못한 칭찬을 했다. 태수의 아버지는 싣고 온 짐을 마루에다 올려놓고는 아내에게,
“당신은 얼른 저녁부터 차리라. 노인네들 시장할끼다.”
말은 짧았지만, 긴 여정 끝의 허기와 피곤함이 묻어났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던 태수는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양말을 벗었다. 그때, 태수 옆에 아버지가 다가와 앉았다.
“우리 아들, 서울서 공부한다고 고생이 많제? 아버지가 다 안다. 방학 동안은 공부 안 해도 되니까네, 아버지 일하는 데 같이 가서 설렁설렁 손이나 좀 거들어 도고.”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뿌듯함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방학 숙제는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논에 농약을 뿌릴 때 호스를 팽팽하게 잡아주는 일, 고추밭에서 고랑을 따라 줄을 잡아끌어주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여름철의 뙤약볕 아래에서 그것은 어른들도 버거워하는 노동이었다.
이제는 팔다리가 부쩍 자라 어른들만큼 힘을 쓸 수 있게 된 태수였기에, 아버지에게는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또한 그런 태수의 모습을 보며, “이제 제법 사내다워졌다.” 하고 흐뭇하게 웃곤 했다. 태수는 피곤했지만, 자신이 가족에게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힘이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