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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의 그와 일요일의 그녀

진아 07

by 융 Jung

진아 07

 케네디 공항의 자동문이 천천히 열리자, 자메이카 베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곧장 밀려 들어왔다. 공항 내부의 차가운 공기와 섞이면서 습기가 가볍게 감돌았고, 진아의 코끝에는 희미한 소금기 냄새가 묻어났다. 낯선 향수와 갓 내린 커피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 그리고 기계에서 풍기는 금속성 기운이 뒤섞여 공항 특유의 향을 만들어냈다. 웅웅 거리는 안내 방송이 천장을 타고 울렸고, 바삐 오가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진아는 지숙의 손을 꼭 붙잡고 두리번거리며 발끝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잠시 후, 인파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희 이모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가족을 마주하는 순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아는 안도감이 물밀 듯 밀려와 가슴이 탁 놓이는 듯했다. 그러나 곧 의아함이 따라왔다. 이모는 혼자였다. 진아는 분명 사촌들이 줄지어 달려 나올 거라고 믿었고, 이름만 들어본 존슨 이모부가 함께 서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희 곁엔 누구도 없었다.

 “진아야, 지숙아!”
 지희가 반갑게 부르며 다가왔고, 따뜻하게 포옹을 나눴다. 진아는 품 안에서 짧게 숨을 들이쉬며 그 아쉬움을 삼켰다. 이후 한 달을 머무는 동안에도 존슨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듯, 그저 공기처럼 희미한 이모부였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자 풍경이 달라졌다.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도로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초록빛 수풀이 이어졌다. 사가포낙은 뉴욕에 속해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했다. 길 끝에는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였고, 곳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 냄새와 흙냄새가 창문을 타고 흘러들었다. 진아는 얼굴을 차창에 바짝 붙이며 눈을 크게 떴다.

 “와… 성 같아.”
 멀리 보이는 집들은 저택이라기보다 작은 성채에 가까웠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유럽식 건물, 드넓은 잔디밭 가운데 놓인 하얀 목장풍 집, 정원이 공원처럼 꾸며진 집…. 하지만 저택과 저택 사이는 워낙 떨어져 있어, ‘이웃’이라고 부르기엔 낯설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진아는 조금은 텅 빈 듯한 풍경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곧 이어질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해변은 금세 마음을 달래주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모래성을 쌓으며 노는 아이들 속에 섞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국제학교 부속 유치원에서의 짧지 않은 경험, 그리고 꾸준한 영어 공부 덕분에 진아는 쑥스러움 없이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웃음소리와 파도 소리가 겹쳐 울릴 때면, 이곳이 낯선 땅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아는 믿기 어려운 장면과 마주했다.
 “마리?”
 모래사장에서 아이들과 뛰노는 그 얼굴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한국에서 부속 유치원을 함께 다녔던 친구, 마리였다. 두 눈이 동그래진 진아는 반사적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세상은 넓다고들 하지만, 그 순간 진아는 세상이 오히려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뉴로셀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차로 반나절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이 놀라운 재회는 사실 지숙의 배려 덕분이었다. 지숙은 진아가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외롭게 보낼까 염려해, 한국에서 알게 된 마리의 엄마 첼시에게 미리 연락해 둔 것이다. 첼시와 지숙은 한국에서부터 교분을 쌓아왔기에 서로를 만난 순간 진심 어린 반가움을 나누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음에도, 사소한 옛 기억 하나로 금세 다시 친밀해졌다. 마리는 잊고 지냈던 한국어를 쓰면서 머릿속에서 흩어지고 옅어진 줄 알았던 타국의 언어를 진아를 통해 한 데로 모으고 진하게 다시 기억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진아도 그간 공부해 온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겪을 수 있었고, 마리가 하는 말 중에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물어 깨쳤다.

 사가포낙의 생활은 조금씩 윤곽을 잡아갔다. 지희 이모의 집에는 낯선 말씨의 가사도우미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후아나 과달루페. 한국에서처럼 ‘이모’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후아나의 넉넉한 웃음과 포근한 인상은 오히려 더 든든했다.

 처음 둘이 조우했을 때, 지희는 진아가 망설이는 것을 알아채고 친절히 둘을 서로에게 소개해 주었다.
 “후아나, 이 아이는 내 여동생의 딸, 진아예요. 진아야, 이 분은 이 집을 총괄하는 분, 후아나 과달루페. 앞으로는 ‘미세스 후아나’라고 불러야 해. 필요한 게 있으면 주저 말고 부탁하렴.”

 후아나는 지희와 눈을 마주치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름진 손을 아이에게 먼저 내밀었다. 손바닥은 조금 거칠었지만, 햇볕과 바람을 오래 품은 듯 따뜻했다. 진아는 반갑게 두 손을 모아 포개어 잡았다. 후아나는 남은 손을 앞치마에 살짝 닦고는, 작고 보드라운 아이의 손을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그 순간, 진아는 자연스레 영어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미세스 후아나. 제 이름은 진아예요. 한국 이름과 영어 이름이 같아요.”

 후아나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답했다.
 “그냥 후아나라고만 불러도 된단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진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음이 놓였고, 초대하기를 잘했다는 뿌듯한 마음에 뭉클한 행복을 느꼈다. 지숙도 낯선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자리 잡는 아이를 보며, 이번 여름방학이 다시 한번 멋진 추억으로 채워질 것임을 확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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