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6년 차에 두 번의 전세를 마무리 짓고 신혼부부 특별공급으로 분양받은 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남편과 나는 인테리어에 대한 상의를 마쳤다. 내 집이 생겼으니 진짜 자기 취향에 맞게 예쁘게 꾸며보자고 말이다. 신이 났다. 뭔가 거창하게 바꾸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만큼은 '핑크 색깔로 바꿀 수 있는 게 뭐가 있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곧바로인터넷 검색창에 '핑크색 인테리어'라고 입력했다. 수많은 핑크색의 집이 이미지로 펼쳐져 나왔다. 부러움을 뒤로하고 현실적인 예산에 맞게 다시 검색을 해야 했지만 한쪽 벽면 정도는 바꿀 정도가 되었다. 밋밋한 벽면을 핑크색으로 바꿀 생각으로 계속 보긴 하는데 생각보다 감이 잘 서질 않았다. 역시 직접 눈으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집이기에 의미를 더 두고 싶어 셀프로 페인트칠을 해보기로 다짐을 하고 페인트 가게에 들러봤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핑크색은 내가 알고 있는 색상보다 더 다양한 색으로 존재했다. 같은 듯 묘하게 다른 핑크색들의 배합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색을 찾기란 꽤 어려운 일이었는데 아마 나는 이때부터 내가 갖고 있는핑크 색상들을 팔레트처럼 모아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지도 모른다.
"핑크색 좋아하시나 봐요! 다른 색은 안 보시네요?"
"네. 그런데 좋아하는 거랑 또 다른 느낌이네요. 이렇게 많은 핑크색이 있는데 저는 왜 맘에 드는 색을 못 찾고 있을까요?"
"좋아할수록 그 안에서 또 호불호가 생기게 되잖아요. 저는 우드를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오히려 가구를 고를 때 우드 제품들은 깐깐하게 체크하는 편이에요. 나무 수종이나 색깔, 결까지 전부 제 취향에 맞아야 하거든요. 좋아하는 것에 예민하게 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핑크찾아 삼만리
그랬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발품이 필요했던 이유다. 핑크색을 좋아한 만큼 핑크에 대한 마음도 더 단단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까탈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사 후 1년이 지나 꺼져가는 검은색 가죽 소파를 처분하고 핑크색 패브릭 소파로 바꿀 때에도 그랬다. 소파의 재질 때문에도 여러 번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핑크색의 색감을 찾는 것이었다. 남편은 “핑크색 소파 찾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핑크색이면 다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네!” 하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핑크색을 좋아하며 좋아하는 핑크톤이 여러 번 바뀌었다. 10대 때 좋아했던 핑크의 색깔이 다르고, 20대, 30대에 좋아했던 핑크 색깔이 다르다. 어릴 때에는 내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핑크가 집 앞 문방구에서 본 핑크색이었다. 여자아이들이 고를 수 있는 한정된 핑크색 노트, 핑크색 다이어리, 핑크색 헬로키티 파일케이스, 누구나 떠올려지는 그런 핑크색을 보며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중고등학생 때 역 주변의 지하상가를 돌아다니게 되면서 작은 소품과 액세서리들이 파는 곳을 자주 찾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핑크색을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20대가 되면서 핑크색의 격변이 있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패리스 힐튼이 등장할 때마다 입었던 의상과 소품에는 화려한 핑크가 빠지지 않았고 점점 내가 아는 핑크색은 많아져갔다. 갈수록 과감해지는 스팽글 치장에 연핑크와 핫핑크를 넘나드는 벨로아 트레이닝복까지 섭렵하려던 여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이제는 좋아하는 색이 다른 것과 잘 어우러져지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차분한 느낌이 드는 베이비 핑크나 인디핑크색을 좋아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핑크 색깔의 유행에 내가 떠밀려간 건지도. (맞다. 유행이다. 색깔도 유행을 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예민한 핑크색 안테나를 세워 매번 나만의 대표색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까탈스러운 핑크의 세계
핑크를 좋아할수록 나는 더 색깔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핑크색에 대한 예민함을 인정하며 지낸다. 일정 금액 이상으로 물건을 사고 사은품으로 주는 수세미에도 나는 아무것이나 집어오지 않는다.
"아, 제가 핑크색에 예민해서요. 이것들 중 골라가도 될까요?"
곳곳에 다양한 핑크가 깔려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조금 인용해보면 수많은 핑크색도 자세히 보아야, 오래 보아야 더 예쁜 것을 찾을 수 있다.
핑크뮬리와 댑싸리
원하는 핑크가 아니란 말이다!
요즘 청명한 가을 하늘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나들이를 다닌다. 주말이 지나고 나면 지인들은 내게 당연하다는 듯, "핑크 뮬리 보고 왔어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이유는 당연하다. 아직, 내가 원하는 핑크빛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늘 이게 불만이다.) 직업이 사진작가라면 사람 없는 새벽부터 몸을 움직여 핑크 뮬리 명소들을 모조리 돌아다니며 예쁜 핑크색깔을 담아두고 싶다. 그 정도로 핑크 뮬리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내가 몇 년째 경험한 핑크 뮬리는 가보면 너무 자줏빛이거나, 아니면 너무 색이 빠져 흐릿하거나, 또는 이미 사람들의 흔적으로 뉘어져 있는 상태다. 사진에서 봤던 매혹적인 핑크빛은 모두 포토샵으로 색감 수정을 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벚꽃의 개화시기를 알려주는 것처럼 핑크 뮬리도 언제 가장 예쁜 핑크색인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이가 더 들면 그때는 사방에 피어있는 들꽃의 자줏빛에 마음이 뺏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동하는 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핑크에는 예민할 것이기에. 여전히 핑크를 좋아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