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색이 조금 바랜 청바지에 연한 분홍빛의 니트를 입고 있었다. 봄기운이 돌기 시작했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였다. 히터를 틀어놓은 창가의 하얀색 블라인드 아래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 놓인 동그란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테이블 위에는 천원샵에서나 팔 것 같은 조그만 탁상시계와 크리넥스 한 통이 놓여있다. “따뜻한 차 한잔 드실래요?” 하고 군살 하나 없이 마른 몸을 한 그녀가 물었다. 둥굴레차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건네받고 앉아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뜯어보았다. 마르고, 창백하고, 어딘가 조금 바스러질 것 같은 이미지. 이십 대 후반 아니면 많아봐야 삼십 대 초반,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머리는 대충 하나로 질끈 묶었고 피부는 푸석하다.
아주 오래된 기억인데도 언제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들이 있다. 내가 떠올리는 그녀에 대한 이 첫인상은 그중 몇 안 되는 선하고 부드러운 것이라 소중하게 다루는 기억이다. 그날 나눈 대화가 모두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문장들은 여태 나의 마음에 달라붙어 있다.
첫 아이가 밤잠을 길게 자기 시작한 시기였다. 조기졸업을 포기하고 휴학을 한 채로 임신,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창창한 나이에 왜 인생 말아먹는 짓을 하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선택한 일이었다. 특히 나를 아끼던 사람들의 반대가 더 심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한 일이었으니 힘들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내가 '안다'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정도만 직감으로 알 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우울증 자가진단 질문지가 있었다. 착실하게 빈 종이를 가져와서 예, 아니오에 하나씩 답하고 점수를 매겨보았는데,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심각한 수준'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책 덮고 얼른 병원에 가 보라는 조언과 함께. 그날 저녁 퇴근해서 네가 무슨 우울증이냐고 코웃음을 치며 넘기던 남편에게 “여기 9층 아파트 복도에서 자꾸 뛰어내리고 싶어 지는 게 갈수록 잦아지고 상상이 점점 현실적이 되니까 왠지 무서워져서 테스트 한번 해본 것뿐이야.”하고 담담하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정신의학과에 찾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병원 앞까지 마중을 해준 남편이 “이런 거 기록 남겨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건강보험 적용하지 말고 결제하라"며 현금을 쥐어주었고 그 말을 들으며 병원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이미 인생을 말아먹은 정신병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묻는 카운터 직원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요, 저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만난 의사의 질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무적이었다. 내 얘기는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다는 느낌을 받자 주눅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 한두 번 보는 거 아니라는 말투로 “일단 약부터 드시죠, 한 달치 처방해 드릴 테니까 이것부터 다 드시고 다시 오세요" 하고 단번에 결론이 났다. 약을 먹지 않고 나아질 방법은 없나요, 하고 묻는 나에게 “일단 약을 먹고 증상이 나아져야 상담이든 뭐든 해보는 겁니다"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심리상담가를 찾은 것은 남편이 다니던 회사의 복지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당시에 한 시간 상담료를 지불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텐데, 1년에 총 6번까지 무료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전문상담사를 연결해준다고 했다. 관련 내용을 인사팀에 물어보면서 자기를 이상하게 볼까 봐 눈치가 보이고 걱정이 되었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나도 그에게 눈치가 보이고 걱정이 되었고, 다시 주눅이 들었다. 그렇게 강남역 근처의 심리상담소 건물을 찾아가던 마음은 복잡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병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나를 마중 나온 상담사는 웃으며 안내를 해주었고 나는 따뜻한 종이컵을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간단한 신상 확인 질문을 하던 그녀가 상담이 처음이라는 내 말을 듣고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는지 본인도 얼마 전에 엄마가 되었다고, 출산휴가를 마치고 이제 막 복귀했다고 해서 속으로 조용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저렇게 어리고 마르고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사람이 아기 엄마구나 생각하고서 문득 나를 보며 놀라는 사람들도 이런 비슷한 마음일까 싶었다. “아직 그렇게 젊고 애 같은데 아기 엄마 맞아요?" 하는 얘기를 다들 입 밖으로 꺼내어한다는 점이 좀 달랐지만.
말을 차분하고 조곤조곤하게 하는 그녀는 질문을 하나 하고 나면 내가 이야기를 이어 나갈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고개를 주억주억하며 공감의 표시를 하거나 중간중간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라거나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요?” 하며 내 이야기를 끌어냈다. 대답을 하는 내내 나는 꽤나 객관성을 유지했다. 가장 힘든 이야기를 가장 아무렇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고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말투로 내가 지금 여기에 앉아서 상담을 받게 된 연유를 요약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녀는 간간이 적어나가던 노트를 내려놓은 채였고, 나를 바라보더니 “정말 힘드셨겠네요…” 하고 얘기했다.
바로 그다음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왠지 어색하다 싶은 정도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녀가 크리넥스 통에 손을 뻗어 휴지를 한 장 뽑아 눈가를 닦았다. “아… 죄송해요. 보통 이러지는 않는데 너무 공감이 되어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힘드셨을 거고 지금도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근데 그 얘기를 너무 담담하게 하시는 걸 보니까… 많이 눌러 담는 편이신 것 같고, 지금도 눌러 담겨있는 게 많을 것 같은데. 그걸 생각하니 제가 좀 복받쳐서.” 그 말에 “아…네…” 정도 말고는 달리 반응할 수가 없었다. 조금 울컥했지만 그렇다고 나도 같이 울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잠깐의 침묵 덕분에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금세 분위기를 바꾸었다. “죄송해요, 이런 적 별로 없는데. 제가 모유수유 중이기도 하고 아직 호르몬이 오르락내리락해서 더 그랬나 봐요.” 하고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작 내가 눈물을 조금 흘린 것은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였다. 어째서인지 조금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꽁꽁 눌러 담아둔 마음을 누군가가 슬쩍이라도 엿보아 주었다는 것, 심지어 나 대신 눈물을 먼저 흘려주었다는 사실에 마음 한켠이 조금 느슨해져서 그 틈을 타고 눈물이 조금 새어 나왔다.
그녀가 눈물을 흘린 것은 첫 상담 딱 한 번뿐이었고, 역시 그 눈물은 모유수유와 호르몬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상담사가 매번 내담자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리면 상담의 진행을 걱정하기 이전에 마음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당연한 얘기. 그 이후로 여러 명의 상담사를 만났지만 역시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항상 내 쪽이었다. 그때 느슨해진 마음 한켠이 그대로 남아 상담을 받을 때마다 눈물이 솟아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역시 그녀의 눈물 덕분에 그 이후로 십 년 넘게 상담을 받으면서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지치고 힘든 고비들을 넘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게 나를 열어 보이는 것은 두렵고, 괴롭고, 어려운 과정이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식구에게도 그러한데, 하물며 내 쪽에서 돈을 지불하고 난생처음 마주 앉은 상담사에게야 오죽할까. 그간 상담을 받으며 겪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의 속을 끄집어내어 살펴보는 과정을 멈추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혹 좋은 상담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더욱 다행이고 감사한 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누군가 나에게 힘들었지 하며 손을 슬쩍 잡아주거나 등을 쓸어줄 때,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어떤 순간들에는 가끔 분홍색 니트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