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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Aug 11. 2022

밤마다 호텔 침대에서 자는 법

소중한 꿀잠을 위하여, 다림질 필수.

호텔방에 대한 로망이 생긴 것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자리에서 한 워킹맘이 내뱉은 대사. “판타지? 내 판타지는 하얗고 깨끗한 호텔에 처박혀서 아무도 엄마, 여보, 하며 나를 부르지 않는 조용한 방에 나 혼자 가만히 있는 거야." 워낙 오래전에 본 장면이라 분명 내 기억 속에서 각색되었을 테지만, 아마도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워킹맘이었던 나는 그녀가 한 말이 얼마나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른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깨끗하고 하얀 호텔방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조용한 공간. 남이 치워주는 방에서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남이 정리해주는 침대에서 자면 참 좋겠다는 판타지.


그 판타지를 실현할 기회는 이직을 하고 해외출장을 다닐 기회가 생기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입사 교육을 받으러 간 생애 첫 해외출장에서 체크인 카운터 직원이 방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바람에 첫 출근도 하기 전에 애사심이 생겨났다. 한쪽 바닥부터 천장까지 통유리로 된 널찍하고 고급스러운 방.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그 한가운데에… 킹 사이즈 침대가 있었다. 호텔 방에서 혼자 자본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커다란 침대를 나 혼자 차지하고 자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들어와 샤워를 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췄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게 펴진 이불을 건드리는 게 두근두근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모른다.


출장을 떠나는 날에 짐을 싸서 현관 앞에 내다 놓으면 가지 말라며 한 놈은 입구를 막고 한 놈은 내 신발을 숨기는 통에 떠나는 마음은 한 번도 가볍지 않았지만, 그래도 출장지에 도착해서 조용한 호텔방에 짐을 내려놓으면 찾아오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즈음에는 이미 불면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은 때였기 때문에 나 혼자 침대를 독차지하고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 짜릿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불면도 상관없이 시차 적응을 하느라 새벽 4시에 깨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순간에도, 잠을 못 자고 있다는 사실로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마음 편했다. 집에서도 이렇게 호텔 침대 같은 새하얀 이불을 깔아 두고 매일 럭셔리하게 자고 싶다, 하며 나도 모르게 매번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나왔다.




이혼을 결정한 시점이 아직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라서 이사할 집은 고르면서부터 제약이 많았다. 아이들이 매주 집을 옮겨 다니기 편하도록 같은 단지 안에서 집을 구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 올라와 있던 매물은 딱 하나. 나는 집도 보지 않고 부동산 업자에게 연락해서 집세 깎지 않고 무조건 계약할 테니 그 집을 나에게 달라고 했다. 그 메시지가 절박하게 들려서였는지 쉬운 세입자라는 판단 때문이었는지 집세는 물론이고 집과 관련된 모든 것을 협상하지 않는 조건으로 우선권을 얻었다. 3구짜리 가스렌지는 2구만 작동되고 침실의 나무 바닥이 다 벗겨져 있는 것 정도는 애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는 모든 것을 수입하는 나라인데 통관이 비정상적으로 밀려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구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진열된 가구나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가구를 보고 예뻐서 문의했다가 최소 3개월 길게는 6개월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번 마음을 접어야 했다.


어차피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살면서 원하는 걸 고집부려 얻은 기억은 별로 없고 포기하는 것이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상대방에게 피해가 갈까 봐, 왜 그렇게 까탈을 부리냐는 핀잔을 들을까 봐, 아니면 내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스러워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삶을 꾸리는 것은 익숙한 방식이었고 평소의 나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 포기하고 손에 닿는 옵션을 선택했을 거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뭐 그리 대단한 침대를 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것만은 쉽게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침대를 찾느라 인터넷을 실컷 뒤지다가 '불면증이 있는데 이 침대를 사고 10년 만에 꿀잠을 잤다'는 후기를 읽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그 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었더니 "분명히 너 같은 사람을 낚으려는 마케팅성 후기야"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그렇지? 나도 동의해. 그렇게 말하고 결국 나는 리모컨을 누르면 제로 그래비티로 각도를 바꿔주는 침대를 굳이 기다려 한참만에 받았다. 정말 그게 뭐라고, 처음 침대를 작동시키는데 어린애처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신날수가, 내가 원하는 걸 갖는다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이었다니.


그래서 내친김에 더 가본다. 새하얀 호텔용 침대보 세트를 주문하고 오리텔 베개도 주문한다. 이 더운 나라에서 밤마다 이불킥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두껍고 포근한 이불 속통도 세트로 맞춰본다. 불면 전문가답게 머리맡에는 라벤더 오일이 들어간 스프레이를 사다 놓고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에센셜 오일도 종류별로 사 두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제로 그래비티 모드는 침대를 산 첫 달에만 신나게 써봤고 그 뒤로는 침대 밑을 청소할 때 말고는 거의 작동시키지 않는다. 그때 산 숙면 스프레이도 에센셜 오일도 여태 하나도 줄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잘 잔다. 제로 그래비티 없이도, 숙면 스프레이 없이도, 잘만 잔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나 싶으면서도 로망을 이루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는 이 침대가 그렇게나 큰 변화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침대보를 벗겨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해서 반듯하게 다림질을 한다. 어차피 온몸으로 휘감고 자면 구겨질 걸 알면서도 반듯하게 정리된 이불을 바라보는 오직 그 순간의 기분을 위해서다. 다림질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 설렘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한번 맛 들이고 나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반듯한 이불을 살짝 들추고 조심스레 들어가 맨몸으로 사각거리는 이불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정말이지 그런 호사가 따로 없다. 잠에서 깨면 이불 주름을 반듯하게 펴 놓고 바로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쓴다. 아침마다 이게 진정한 힐링이네, 참 감사한 삶이네, 그런 말들을 일기장에 적어 넣는다.


호텔 침대의 로망을 이루었다. 지금의 숙면을 가벼이 여기지 않듯 나의 새하얀 침대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아침마다 햇살을 한가득 받아내는 이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렇게 가끔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게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는 걸 지금이라도 배워서 참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소소한 로망을 이루어보고, 원하는 게 있으면 슬쩍 손을 뻗어보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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