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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Sep 07. 2018

버리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여자의 촌스러운 냄비받침

  그야말로 비우는 삶, 정리하는 삶이 유행인 요즘이다. 비우는 라이프 스타일, 미니멀라이즘의 홍수 시대다. 아이러니하게 그 홍수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버거운 숙제를 짊어지게 되었다.

 나처럼 쌓아 가며 추억해 가며 잊지 못하며 사는 사람은 왠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기도 하고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남편이나 그의 여동생이나 친정 엄마가 사람들 다 보는 데에서 공개적으로 정리 못하는 나를 들먹거리면 나는 크게 공격이라도 받은 여자처럼 버럭 하고는 한다. 찔리는 게 있어 그런 것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절반 정도는 정리하는 능력으로 인간 순위를 매길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인간 순위를 그렇게 매긴다면 나는 너무 밑바닥일 테니 괜히 방어기제가 작용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내가 잘 못하는 일이다 보니 정리하는 습관이나 능력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 아닐까. 어쨌든 누군가 그렇게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특별히 아니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가장 잘 못하는 일은 버리는 일이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는 이런 말을 할 때 고백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서 동생과 자취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새로 얻은 집에 오셨다가 장만해 주신 부엌칼이며 냄비받침이 여전히 내 부엌에 있다. 그간 나는 취직을 했고 여러 회사들을 옮겨 다녔으며 연애도 했고 결혼도 했고 두 아이도 낳았다. 헤아려 보면 15년이 넘는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이사도 잦았고 삶의 변화도 많았다. 살다가 버리려고 애를 써 보기도 했을 테고(선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실은 잃어버렸다고 할 만한 순간도 있었을 테고(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는 물건은 보통 꽤 오래 지니고 있게 된다, 나의 징크스다), 또 일부러 같은 종류의 새 물건을 사 와서 낡은 물건에게 잔인하게 교체의 시기를 선언한 적도 있을 테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무척 주관적인 판단임) 자꾸만 나를 따라다니는 물건들이 있다. 그 부엌칼과 냄비받침이 그렇다.

  지금까지 쓴,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오늘 아침 부엌에서 오래되고 유행에도 한참 뒤떨어지는 냄비받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냄비받침 이야기를 하려고 긴 문장과 문장을 쓴 것이다. 부엌칼은 사실 검은색 손잡이에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은빛을 하고 있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에 평소에 그다지 내가 신경을 쓰지 않지만, 냄비받침은 다르다. 


  그 냄비받침은 일단 분홍색이다. 그리고 파자마 소녀들 캐릭터가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거기에 더해 캐릭터 이름까지 영문으로 아주 깜찍하게(사실 요즘 내 취향으로는 끔찍하다고 표현해도 대수롭지 않을 만큼 귀엽다) 쓰여 있다. 어떻게 그런(?) 냄비받침을 엄마와 사 들고 왔는지 전혀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여기까지 줄기차게 그 촌스러움에 대해 피력해 놓고서는 기억나서도 안 되겠지) 그런데 나는 어쨌든 그 냄비받침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엊그제 한 목수에게서 냄비받침을 선물로 받았다(그가 그 네모난 나무 받침을 냄비받침이라고 말했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무로 된 두 개의 냄비받침은 한지를 붙이는 옛날 방문의 빗살무늬 같은 무늬까지 정성스럽게 조각되어 있어 받는 순간 기분이 참 좋았다. 나는 아마 냄비받침을 좀 바꾸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집에 이사를 한 뒤 나는 코르크 소재의 예쁜 냄비받침을 장만했었다(보는 사람마다 다 예쁘다고 하고, 어디 외국에서 사 왔느냐는 질문도 들은 적이 있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그때도 아마 나는 그 파자마 캐릭터가 그려진 분홍색 냄비받침 말고 다른 냄비받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었나 보다. 그런데 차마 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목수에게 아름다운 냄비받침을 받고서는, 실은 곧장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 분홍색 냄비받침을 조심스레 꺼내서 재활용 쓰레기들을 버리는 마대자루 속에 살짝 넣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아침,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갔다. 비가 오지 않았는지 하늘 한 번 보고 촉촉한 공기에 손바닥을 대 보며 마대자루를 뒤졌다. 그리고 그 분홍색 냄비받침을 꺼내서 다시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깨끗이 씻어서 찬장으로 직행. 그 뒤로 그 녀석은 바깥으로 쉽게 나오지 못했다. 지금 식탁과 부엌과 어울리는 다른 냄비받침들이 많으므로. 앞으로도 손님을 너무 많이 치르는 큰일이 있다거나 명절에 우리 집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 냄비받침은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집에 사는 동안 영영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냄비받침을 버리지 못하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버릴 생각이 없다. 
  처음 서울시 시민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내가 졸업하기만을 기다렸다가 겨우 이상한 안정을 찾았던 착한 동생과 걱정, 후련함, 기대, 고마움, 미안함 등 온갖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딸들 옆을 며칠 서성이던 엄마 여전히 같은 상태인 그 엄마 때문에 나는 아직 그것을 버리지 못하겠다. 
  아직 나는 그 시절 그 불안하고 미완성이던 스물셋의 상태에서 멀리 오지 못해 그것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다. 


  언젠가는 아마 가뿐해지겠지. 어쩌면 조만간, 또 어쩌면 너무 먼 미래에. 
그것을 버리는 그런 일은, 
그런 시절이 오면 상상하지 못했던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강요하지 말자. 
자꾸 무엇이든 버리자고. 
추억, 기억, 상념, 과거, 미련 같은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자. 
나는 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무엇으로 지어진 집인지가 
참으로 중요한 사람이니까. 


  낡고 촌스러운 분홍의 냄비받침을 이따금 보며 나를 촘촘히 엮고 있는 역사를 긍정하려고 애쓰며 사는 사람이니까. 

  그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집보다 살림보다 마음이 가벼워질 때까지, 좀 더 가지고 있는다고 해서 큰일이야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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