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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31. 2018

예쁜 양념통 속에 뭉쳐 있는 어떤 기억들

언제부터일까. 

엄마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건.

어린 시절에 엄마란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 시기를 건너면 완벽해 보이던 존재에게서 불안과 미숙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대체로 그 시절이 사춘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사춘기는 엄마가 집을 나갔고(0.7박 정도 될 듯한 애매한 시간 동안), 나는 집 나간 엄마의 옷장을 뒤지던, 그런 발칙했던 시절부터일지 모르겠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니 좋은 것이 있었다. 다는 아니었지만, 금지된 것을 해 볼 수 있었으니까. 엄마의 커다란 재킷을 걸쳐 보는 것이 왜 금지된 일이었는지에 대해서 답하자면 특별히 말할 것이 없다. 아마 내가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어른의 세계를 넘보는 행위는 들켜서는 안 되는 거라고 믿는, 소심하고 연약하고 어떤 불안을 내재하고 있던 아이였을 것이다.

 

완벽했던 엄마와 불완전했던 엄마, 그 경계를 지나온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건 양념통 때문이었다. 완벽함과 불완전함의 상태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는 개인의 경험과 역사와 의식과 철학에 기반하는 것일 테다. 뭐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데, 한 마디로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추상적인 말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나의 경우에는 사소한 것들을 통해 의미를 찾고 조심스럽게 규정하기도 하고 지난 삶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늘도 역시 아주 사소하게 설탕이 담긴 양념통을 보다가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음식도 잘하고 무엇이든 말만 하면 뚝딱뚝딱 나오고(사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해 준 것만이 내 음식의 세계였던 시절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 엄마에게서 뚝딱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주방 정리까지도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돈도 열심히 벌었고, 친정 식구들을 다 거둬 먹일 정도로 열심히 살았고, 시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모자라 시조카들 몇 명까지 학교에 보내며 키우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철인 같았던 엄마. 그런 엄마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정말로 사소한 양념통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유리병 안에 딱 그것의 주인인 양념만 고유의 빛깔로 단정하게 담겨 있는, 입구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아서 뚜껑을 돌릴 때 손에 전해지는 까슬한 미동 따위가 전혀 없는, 유리병 바깥쪽은 그야말로 깨끗하게 닦여 있어서 기름때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양념통.

그런 양념통이 엄마의 것이었고, 그런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단정한 삶이 엄마의 것이었다. 사춘기 이전에 내게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다 나도 머리가 점점 굵어지고 식당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엄마가 창피하게 느껴질 때쯤(그 시절엔 엄마의 많은 것들이 창피하고 불편하다) 엄마의 양념통을 보았다. 고춧가루와 알 수 없는 다른 빛깔의 어떤 가루들이 조금 섞여 있는. 아니 섞여 있다는 말은 틀리겠다. 정말로 약간의 흔적일 뿐이었으니까. 그런 것들을 보며 엄마의 불완점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부로만 살 때도 시부모님 덕분에 세 끼 밥상을 진수성찬으로 내야 했고, 일주일에 절반은 친척들 발길로 잔칫상을 내야 했고, 집에 들이닥치는 딸내미 친구들 간식까지 챙겨야 했으니, 아파트 모델하우스 안의 주방에나 있을 법한 양념통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이었을 테다. 어렸던 나는 그런 엄마에게 왜 반짝이는 양념통을 상상했을까. 대체 그런 걸 보기는 했던 걸까. 물론 양념통 안에 조금 섞여 들어간 고춧가루 하나로는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엄마가 깔끔하신 분이기는 했으나, 왜 나는 더 과하게 홈쇼핑 채널에서나 볼 법한, 살림의 연속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양념통을 엄마에게 기대했던 것일까.  

그것이 어린 내가 엄마에게 가졌던 환상이었을 것이다. 환상이 깨지면서, 그러니까 소설 <데미안>에서 말하듯 알을 깨고 나오면서, 나는 엄마라는 존재를 직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아끼기 위해.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의 비슷한 양념통이 내 머릿속에 있기에, 나는 찬장에 둔 양념통을 꺼내 쓸 때면 뚜껑을 열어 꼭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스푼으로 필요한 만큼만 양념을 덜어내고 다시 찬장에 넣어둘 때는 양념통을 행주로 깨끗하게 닦아 넣는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바빴을까. 오전에 꼭 보내야 하는 원고를 보내고, 오후에 오기로 한 손님들을 맞기 위해 급히 장을 보고, 닭은 양념에 좀 재워두고, 스테이크는 마리네이드를 해 두고, 나머지 음식들의 레시피와 차례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가며 딸아이를 픽업하고, 또 돌아와서 서둘러 청소를 하고, 미처 만들지 못한 음식을 하고. 그렇게 급히 하루를 보내며 손님맞이를 하다 보니, 고춧가루 떴던 숟가락을 설탕병에 쓰-윽, 하고 넣게 되는 것이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어느새 숟가락이 거기 있었다. 
한 톤 가라앉은 부드러운 크림 빛깔로 반짝이는 설탕 입자들 사이에 
붉은 고춧가루 입자가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 나보다 바빴겠지. 나보다 힘들었겠지. 많이 지쳤겠지. 그래도 급히 서둘러 음식을 해서 식탁 위에 내면 재잘재잘 맛있다며 먹는 딸아이들을 보며 웃었겠지. 


엄마 생각을 하며 차분히 고춧가루를 걷어냈다. 그러고 보니, 설탕병 안에 꼭 나 같은 덩어리 하나가 담겨 있다. 깨끗하게 쓴다고 해도 이따금 그렇게 덩어리가 생긴다. 

그저 그런 양념통 안에 꼭 나 같은 덩어리가 하나가 굴러다닌다. 여전히 유년은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갈등의 근원인, 미성숙한 상태로 어른의 세계에 진입해 어른아이라는 말조차 부끄러워 차마 쓰지 못하는, 나 같은 덩어리가 거기 있다.

 



사진을 한 장 찍으려고 설탕병 입구를 한 번 쓰윽 닦았다. 

설탕병의 둘레가 울퉁불퉁하다. 

엄마가 걸었을 그 길 같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 같다. 

쓴 맛을 상쇄시키는 설탕처럼 , 달콤하다는 듯 겉으로 웃어 본다. 역시 본질을 감추려는 미소다. 입가에 주름이 패기 시작했다. 그러니 반성하고 가벼워져야지. 

내 설탕병은 이러하다고 그냥 보여줄 수 있어야지. 이따금 설탕병에 고춧가루가 들어가도 깊이 생각하지 말고 가볍게 넘어가야지. 

지난 어떤 날의 엄마에게 과거 어떤 날의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그리고 지금은 무조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설탕병에 담겨 있는 설탕은 그냥 달콤한 것이라고 여겨야지. 딴생각 말아야지. 

설탕이 만들어 내는 달콤한 케이크 한 입을 입에 넣은 아이처럼, 순진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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