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부엌에서 가장 더럽고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이 어디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혹시 비슷한 대답들을 할까.
가스레인지 오른쪽으로 나 있는 다용도실의 문턱 가장자리, 가스레인지 배관과 벽이 맞닿아 있는 숨겨진 면, 고무장갑을 벗어 던져둔 채 쉽게 잊고는 하는 개수대 앞쪽의 홈, 조리용 정수기 관과 싱크대가 만다는 지점의 지름 2센티미터 정도 둘레, 여러 조리도구가 걸려 있어 창문을 열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는 하는 부엌 작은 창틀, 주방에서는 나름 육중한 무게와 덩치를 자랑하는 정수기와 밥솥 아래, 어쩌다 리필형이 아닌 용기형으로 주방세제를 사는 바람에 한동안 비어 있게 된 디펜서(아, 이거야말로 오늘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시선 고정, 세상에 저런 것까지 신경이 쓰이는구나 하고는 부엌일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절감하게 한 물건),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금세 물때가 끼고는 하는 그릇 건조대, 그 건조대 아래 받침, 도마를 세워 두면 벽과 맞닿는 도마 뒷면의 일정한 곳...... 혹시 이것들 가운데 말하려고 했던 것이 있나.
햇살 좋은 봄날, 미세먼지 없이 오랜만에 청명한 날, 햇볕만 나면 일광욕을 즐긴다는 영국인들처럼 창을 열고 바람에 실려오는 상쾌한 공기를 즐기고 있자니 보이는 것이 그것들이다.
봄마다 이러겠지. 미세먼지에 창문을 꼭꼭 닫고 공기청정기를 수시로 가동한다 한들, 순환에 있어 바람의 힘을 따를 것이 있을까. 며칠 동안 집에 쌓인 눅눅한 공기와 정체된 먼지들을 내보내고 있자니 결코 저절로 사라질 리 없는 부엌의 때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물끄러미, 부엌의 더러운 곳을 향한 시선에 자꾸 열정이 깃들려 할 때 잠깐! 하고 나를 붙든다. 부엌일은 이따가. 지금 말고 이따가. 지금은 고요해야 할 때, 부엌에서 잠시 벗어나 있어야 할 때. 이렇게 햇살이 좋은데 말이야.
엄마는 이따금 집에 오시면, 부엌 구석구석을 치우고 닦는 일부터 하셨다. 꽤 오래 부엌에서 할 일(엄마 기준에서 반드시 그 순간에 해치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들을 하다가 끝끝내 "정원아." 하고 낮은 톤으로 어린 시절부터 꽤 익숙해 있는 그 꾸중의 톤으로 나를 불렀다. 손에는 역시 수채 구멍 받이를 들고. 엄마 말씀의 요지는 나처럼 살림을 하면 다 병에 걸려 죽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정색을 하고 하시는 말씀에 늘 콧방귀였다. "엄마,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사람이 죽는 것은 그가 지닌 습관이나 관성 때문이 아니라 일순간의 한 인간의 몸에 빅뱅 같은 것이 일듯 결정적 계기나 사고이기가 쉽다고 엄마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들을 늘어놓다가 돌아서고는 했다. 수채 구멍은 엄마가 치우시는 걸로 일단락.
그 아이는 찌개 하나를 끓이는 데 있어서도 간이 맞고 안 맞고의 문제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몇 살이기에 음식 한다는 얘가 간도 하나 못 맞추느냐 하며 마치 싸우기 위해 만난 이들처럼 으르렁대며 살았던 남편이 있었는데, 어쨌거나 내가 그 아이의 남편 하면 쉽게 떠올리는 것 하나는 수채 구멍이다. 처형되는 나를 붙들고는 그 아이의 살림하는 됨됨이가 수채 구멍 하나 제때 말끔하게 치우지 못하는 상태라고, 그러니까 수채 구멍에 묵은 때 끼어 있기가 일쑤이게 게으름에 젖어 있다며 하소연을 하고는 했는데, 내가 했던 대답이 그를 어이없게 만들었던 일도 떠오른다. "그게 어때서... 답답하면 직접 치우세요."
수채 구멍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가 수채 구멍과 건강의 상관성에 대해 논리를 펴는 동안에도, 그 애의 남편이 수채 구멍을 매개로 한 여자의 게으른 일상에 대해 떠들 때도 나는 수채 구멍은 깨끗해야만 한다라는 타성에 젖은 논리로 그들이 내 고유한 영역을 침해한다고만 여겼었다.(더러운 수채 구멍이 너의 고유한 영역이냐고 공격하지 말기를) 내 친구 중에는 방에 먼지가 소복하게 앉아서 발끝으로 조심조심 살살 기어들어가 먼지가 일어나지 않게 이불을 살짝 걷고 또 먼지가 일지 않게 쏙 들어가서 들어갔던 그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다시 나와 출근한다는 아이가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직접 그렇게 떠벌리던 귀여운 그 아이의 그런 습관은 나에게는 영영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이야기가 정말로 재미있었다. 그러니 제발 인간의 다양성을 침해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기를.
어쨌거나 그런 나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과 육아에 집중해 보려고 노력하며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채 구멍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관심 밖에 있던 사물이 또 그 사물의 상태가 자꾸 내 시선을 붙드는데,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이었다. 음식쓰레기가 나오면 곧장 치우고, 수채 구멍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비어진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당연히 수채 구멍 아래쪽에 있는 빈 공간에도 물이 차 있지 않게 비운다. 수채 구멍을 꺼내어 박박 닦는 것은 기본이고.
엄마 말을 들어서 그 남자의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수채 구멍이 깨끗한 상태가 내 마음을 쾌적하게 단정하게 한다고 느낀 것이다. 당연히 더러운 것보다는 깨끗한 것이 좋다. 모든 것들은 더러운 상태보다 깨끗한 상태가 우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보다 열등하냐고 한다면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더러움 안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연들이 있고,
또 더러워지게 된 과정과 역사와 필연적인 게으름이 있다.
그 게으름을 매개로 어떤 종류의 인간은
또 다른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는 사람이다.
관심 밖에 있던 '깨끗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이 내게로 들어온 것은 순전히 내게 전에 없던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그 남자에게 조금은 미안하다. 왜 그때 그들의 말에 조금 더 귀 기울이는 척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적인 관계가 맺어진 인간 사이라 그랬을까.
수채 구멍이 완벽하게 깨끗해야 하는지, 좀 더러워도 인정받을 수 있는지 따위에 대해서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히 추호도 없다.
그저 나는 좀 변했고, 앞으로 계속 변할 것 같다는 것.
어쨌든 사람은 늙어간다는 것.
여전히 엄마는 작은 동산 아래 빨간 지붕 집 낡은 부엌에서 수채 구멍만은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손으로 만져도 뽀드득뽀드득 더러운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오후다. 엄마도 혹시 꽃놀이 간다며 수채 구멍 닦는 걸 깜박하는 봄날이 있지 않을까. 그 남자는 별로 궁금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