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그렇듯이 새벽녘 현관 안쪽 중문이 드르륵 열리고 출입문이 닫히고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기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잠이 깨었다. 새벽 3시 반이 안 된 시각. 잠 조절 실패다. 그의 조심성이 실패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와 나의 잠은 한 잠자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소의 양쪽 끝처럼 쉽게 만나 지지 않고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사고처럼 서로 거실에서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나라면 귀찮아서 끊을 텐데... 라는 말에는 나와 그와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디까지나 '나라면'이 전제되는 말이다. 그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고처럼 이렇게 만난다. 그가 담배를 참지 못해서(이것도 온전히 나를 위주로 선택한 낱말이다, 그를 중심으로 한다면 그냥... 그가 담배를 피우려고... 정도가 될 것이다) 문이 드르륵 찰칵 띠링 몇 차례 다양한 소리들을 내며 열렸다 닫혔다 또 열렸다 닫혔다.
쌀쌀하게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몸이 더 추웠을까.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카디건 하나를 걸치고 거실에서 나왔는데, 그가 찌개를 한 국자 뜬 국그릇에 식은 밥을 퍼 담고 있었다. 내놓은 반찬은 새우젓과 울외장아찌가 다였다. 울외장아찌는 내가 양념을 다 걷어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작은 반찬통에 따로 담아 둔 것이 있었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어쩌면 그는 용케도 그렇게 따로 담아 둔 것 대신 울외장아찌가 양념 째로 그대로 담겨 있는 양 많은 그릇을 꺼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울외장아찌의 특성상 그대로 먹기는 어려우므로 그러한 상황은 당연히 피해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새우젓이 문제였다.
- 그걸 그렇게 통째로 두고 먹으면 어떡해. 금세 변하잖아.
- 금방 먹으면 되지.
- 그 많은 새우젓을 어떻게 금방 먹어......
- 금방 먹어.
- 말도 안 돼. 냉장고에 콩나물무침도 있고, 고추 조림도 있는데......
그 뒤로 우리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요즘 밤잠을 전혀 자지 못하고 일에 매달리는 그가 이상한 밥시간에 허기를 채우려다 너무 뜬금없는 공격을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는 원래 작은 다툼이든 큰 다툼이든 내가 끝내면 끝내는 남자니까.
그게 끝이었다. 새벽녘 우리의 사고 같은 만남은.
각자 일을 하다가, 나는 새벽은 여전히 너무 춥다며 두꺼운 파카를 입고 왔다 갔다 하다가 방으로 들어갔고, 그는 더 늦게까지 동이 트고도 한참 지난 시각까지 일을 했을 것이다. 나는 너무 이르지 않은 조용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새벽 동안 참았던 허기를 달래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냉장실로 옮겨둔 그린 카레. 아이들과 밥 먹지 않을 때, 혼자서 조용한 식사를 만끽할 수 있을 시간이 있다면 먹어야지 했던 그 그린 카레를 꺼내며 냉장고 안을 한참 바라보았다. 뭐가 잘 어울릴까. 이른 아침에 여러 가지 반찬은 싫고... 눈에 들어온 것이 네덜란드 원산지의 고다 치즈였다. 따끈하게 데운 그린 카레에 작게 잘라 올려 먹으면 근사하겠다 싶어서 치즈를 꺼냈다. 그리고 지퍼백 입구를 여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계단 모양으로 단정하게 잘라진 치즈의 단면. 분명히 칼을 사용해서 정성스레 자른 흔적이다. 평소의 그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엊그제도 이렇게 사고처럼 거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창고에서 와인을 한 잔 따라오기에 냉장고를 열어서 치즈의 형태를 눈 앞에 보여 주며 말했었다. 그냥 말로만 툭 던졌다면, 그는 결코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 여기 치즈 있어. 통째로 먹으면 안 되고, 꼭 나이프로 잘라야 해. 안 그러면 쉽게 상하니까.
자꾸 늘어나는 잔소리에 우리 관계가 쉽게 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방 살림을 관장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잔소리이기는 하나 나의 그 말이 없었다면 그는 몸도 마음도 쉽게 출출해지는 새벽 심심하게 혹은 배고프게 아무것도 없이(아니면 그가 끝내주게 잘 찾아내는 황태포 하나에) 와인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 그는 와인 한두 잔을 마셨나 보다. 그리고 나의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칼을 이용해서 정갈하게 치즈를 잘랐나 보다. 설마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단정하게 되어 있었다. 바쁘다 보면 지퍼백을 제대로 꼭 닫는 것도 일일 때가 있는데, 지퍼백도 깔끔하게 꾹꾹 눌러 잠겨 있었다.
그가 왜 그랬을까. 어떤 밤 그 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나의 말을 그렇게 잘 따라 주었을까.
조금 후 그가 잠에서 깨어 눈 비비며 거실로 나올 때 정색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빤하다. "그렇게 하라며." 혹은 "맞을까 봐."
그런 상상에 이르니 그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정말로 들리는 듯 착각이 되어 풉 혼자 웃고 말았다.
그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더불어
이 세계의 한 사람이, 나 아닌 한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위안이 불현듯 찾아들었다.
반듯하게 잘린 고다 치즈의 단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듯하게 잘랐지만,
물질의 성질에 따라 미세하게 오돌토돌 올라와 있는 거칠한 입자들이
이 세계에 없는 언어처럼 느껴진다.
그게 말이라면 아마 사랑이겠지.
정말로 엉뚱한 곳에서 뜬금없이 사랑받는 거라고 느끼는 이러한 일상이 한동안 계속되겠지.
사랑하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다름으로 투닥투닥하다가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뜨거움을 느끼며 관계를 지속해 나갈 핑계를 대는 일상이 지속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