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Sep 28. 2018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오후의 대파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오후가 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 너무 게으른 사람인 그런 오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게을러지고 싶은 오후 말이다. 

그런 날 부엌에 어제저녁 들어오다가 사 온 한 단의 대파가 있다면, 그야말로 대략 난감이다. 


내 주변에는 적어도 부엌일에 있어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이들이 많다. 

여정 언니는 장보기를 참 즐거워하지만 일주일이나 지난 시금치를 쟁여 두었다가 나에게 척하고 넘기는 사람이며

시금치가 가기 일보 직전이야

은정 언니는 1.5리터 들이 엄청난 양의 들기름을 쓸 일이 많지 않다며 아무렇지 않게(나는 식재료에 대하여 그렇게 쏘쿨하지 못한데,  그런 모습을 볼 때 정말로 멋있다고 느낀다) 나에게 안기는 사람이고

들기름은 달걀 프라이 할 때나 써서

희영 언니는 스파게티는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고 하며 나의 자존감(?)을 추켜세워 주는 사람이다.(나라는 사람, 참으로 쓸데없는 데서 살아갈 이유들을 찾는다는 것을 안 지 꽤 오래되었다.)

스파게티는 사 먹는 거 아니야?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부엌일에 어지간히 매달리는 나를 향해 이따금 대단히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고는 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지칠 만하면 엉덩이를 토닥토닥해 주며 이 한정된 부엌에서 쉽게 떠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그러니까 이 세 언니에게는 비밀인데, 나는 언니들 앞에서는 척척 이것저것 만들어 내며 부엌일에 있어서는 도가 튼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나는 대파를 써는 일이 너무나도 귀찮아 파의 초록 부분을 참 많이도 버린 사람이다. 가위로 뭉텅뭉텅 잘라내면 반은 쓰레기가 되어 나온다. 그렇게 잘라낸, 말라 버린 대파의 부분들을 버리기에도 우리 집은 얼마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나. 슬리퍼를 신은 채로 계단을 텅텅 내려가서 상수리나무 아래로 쭉 펼쳐진 풀밭 한쪽에 내려두고 오면 끝. 쓰레기장이 아닌 들판에서 마른풀로 마트와 냉장고만을 겪던 것과는 아주 다른 생의 이면과 마주하도록 선심이나 쓰듯 버리며 안녕 한다. 



그런데도 나는 왜 오늘의 스케줄을 오늘의 컨디션을 따지지 않고 대파를 사는 것일까.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은 어쨌든 불현듯 갑자기 찾아들며, 핑계 같지만 며칠 전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고 노트북 옆에 쌓여 있는 도서관의 책들이 발길을 사로잡으면 잠시 부엌에서 서재로 공간 모드 전환이 필요할 때 대파는 참 씁쓸한 존재가 된다. 쇼펜하우어였던가. 소파에 기대어 커피 한 모금을 하며 책을 읽은 기쁨에 대하여 말했던 사람이. 쇼펜하우어가 아니더라도 소파와 커피와 책의 삼합은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법한 구성 아닌가. 아, 커피에 대하여 책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부엌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한 여자는 쉽게 게을러지고 싶은 오후, 책상 앞으로 발길을 옮기며 대파를 본다. 책상 위에 돌아다니는 ‘요즘의 책들’ 가운데 한 권을 괜히 들고 앉아 커피를 한 모금 하며 대파를 본다. 대파가 그렇게 놓여 있는 한 책 속으로 쉽게 빨려 들어가는 일은 어쨌든 어려우니까.


그러면 대파의 이미 고꾸라진 이파리 끝이 
마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 바람에 스치는 것만 같은 착시가 생긴다. 
땅에 몸을 꽂고 있을 때는 얼마나 눈부신 초록이었을까. 
새벽이슬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을 때 아침햇살이 들면 
카메라를 들이대고 거짓말을 연출한 것처럼 반짝반짝 아름다웠겠지. 
대파의 과거와 현재를 한 자리에서 넘나들며 
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젊은 날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잠시 상념에 젖기도 한다. 


대파를 사 오자마자 식탁에 풀어놓고 뿌리를 잘라 깨끗이 씻어 감기용 차를 위해 냉동고에 넣고, 쓸 만큼 적당한 양을 가늠하여 냉장실에 넣으며 많은 양의 파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음식을 떠올리거나 상상하고, 이제 나머지는 쓱쓱 잘라 냉동고에 넣는, 그런 무료한 부지런함을 피울 때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런 날에는 시도 없고 낭만도 없고 자유도 없고 심지어 나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는 한다. 완전체를 추구하는 인간 욕망에 충실한 한 유기체 같다. 

나는 게을러지는 오후의 마른 대파와 썩 어울리는 사람이다. 

정, 당, 화.

문득 그런 낱말이 떠오른다. 

그냥 웃자. 그러니까 나는 대파 한 단의 절반을 버려가면서도 그것에 대해 죄책감이나 무력감을 느끼기 전에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 별 것 아닌 중독의 즐거움이 ‘정당화’라는 낱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게 만든다. 


나는 늘 그러하듯이 게을러지고 싶은 오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싱싱한 대파 한 단을 보면 아무렇지 않게 장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그러면 또 어느 날엔가 대파를 마르게 두며 
우연히 찾아드는 시에 노래에 감정에 
짧은 즐거움들을 맛보며 
사는 일이 썩 괜찮다고 말하게 되는 오후를 맞을 것이다.  
이전 14화 어느덧 음식 냄새를 만들어 내는 어른이 된 것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