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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26. 2018

귤 속껍질을 벗기는 비일상적인 행동에 대한 자의적 해석

지난해 겨울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다섯 가족이 함께 간 여행이었기에 아주 큰 펜션에 함께 묵었는데, 부모들의 연령도 다 다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의 나이도 다 달랐다. 고등학생부터 중학생 초등학생 두 돌도 안 지난 꼬맹이까지 참 다양하기도 했다. 그 다양한 아이들이 다 같이 한 방에 모여 빔 프로젝터에서 흘러나오는 한 편의 영화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평화구나 싶을 정도였다. 가장 큰 고등학생 아이는 영화를 보는 동시에 가장 작은 19개월 꼬맹이의 보드라운 발바닥을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예뻐서였을 것이다. 무심결에 귤껍질을 벗기고 있었던 것은.

귤껍질을 열 개쯤 벗겼을 때였을까. 옆에 있던 텃밭 친구가 놀란 듯 물어왔다.

  “그렇게 껍질을 다 벗겨줘요? 그냥 껍질째 주고 알아서 먹으라고 하면 될 텐데.”

  “맞아, 귀찮아. 그냥 갖다 줘요.”

맥주를 들고 오던 다른 텃밭 친구도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어서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어른들끼리.

무슨 생각이 있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렌지 껍질은 잘 벗겨서 주지만, 귤껍질을 늘 까 주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26개월인 우리 집 꼬맹이는 돌 지나고부터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해 왔다. 귤껍질 벗기는 재미있는 일이야 당연히! 귤껍질을 쭉쭉 벗기는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짤막하게 벗겨내서 온 집 안에 흘리고 다니는 일이 얼마나 신나겠나. <헨젤과 그레텔>의 주인공처럼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이다.

그러니 나는 굳이 껍질을 벗겨 주지 않는 사람인데, 그날따라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너무 예뻐서였을 것이다. 상대가 혹은 눈 앞에 보이는 대상이 혹은 펼쳐진 광경이 너무 아름다우면 나는 이따금 그렇게 안 하던 짓을 한다.



나는 안 하던 짓이었지만, 친정 엄마는 늘 하던 일이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귤껍질을 다 벗겨 주는 것을 넘어 귤 속껍질까지 말끔하게 벗겨내 알맹이만 남게 탱글탱글하게 접시에 담아 주는.

이따금 엄마 말씀이...  딸 둘을 극성으로 키웠다고 했다. 부정할 수 없겠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엄마의 일관된 양육방식에 대해 다른 표현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귤 속껍질까지 벗겨 주는 행동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다고 표현하겠지만. 엄마가 스스로 알고 있고 또 말한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열매의 속껍질 안에 감추어진 과육의 탱글하고 물기 넘치게 반짝이고 
또 혀끝에 닿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그 말캉한 촉감을 알기나 할까. 
그것은 분명히 속껍질째 입에 넣고 
그 안에서 이의 날카로운 부분을 이용해 일단 즙을 짜낸 다음 
과육 속껍질을 질겅질겅 씹어먹는 맛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처음부터 벗겨져 있고 속을 드러낸 채 온갖 향과 맛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는 그것은 눈으로 접하는 순간 욕망의 결정체이며 입에 닿는 순간 몸에 각인되는 사랑의 기억이 된다. 그 모든 즐거움과 행복과 사랑의 순간은 엄마라는 존재가 아이를 기르면 만드는 과정의 축소판 위에서 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우리가 깊은 연애를 할 때에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것이다.


그러니까 귤껍질은 그만 벗기고 대충 주자고 했을 때 나는 굴하지 않고 몇 개를 더 벗겨서 영화가 빛이 대사가 가득 찬 방에 귤 그릇을 넣어 주었는데, 아이들은 어두운 가운데 스크린의 밝은 빛을 기다렸다가 귤을 손으로 집어 입에 쏙 쏙 넣고는 했다.


자립심을 키운다는 명목 하에 아이들 스스로 많은 것을 해 내도록 독려하는 육아 방식이 대세인 분위기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지 않는 그런 육아 방식 말이다. 나 역시 그런 것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어리광 부리라고, 한없이 기대라고 품을 내어 줄 사람 또한 엄마나 아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생에서 처음 느끼는 맛을 가르쳐주는 일이라면 
아이에게 좀 넘치는 어리광이나 사랑도 
이따금 허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 저녁에는 밥 먹자마자 간식, 간식...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잔소리 한마디 없지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일일이 까서 입에 넣자마자 톡톡 터지는 새콤달콤한 맛의 기쁨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지. 내가 기억하는 그 기쁨을 내 엄마에게서 받은 보석 같은 경험을 오늘 식탁에서 선물해야지. 지금, 아이들이,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 리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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