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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예 Jan 20. 2023

엄마가 아프면 아빠가 걱정된다

걱정이란 뭘까

엄마가 코로나 격리기간이 끝나도록 식사도 못하고 링거를 맞고 있다. 함께 코로나에 걸렸던 아빠는 이제 격리를 마치고 출근도 하는데 엄마는 여전히 병상이다. 엄마는 씩씩하고 명랑하지만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간다. 신체가 약한 사람이다. 들떠서 신나게 살다가도 어느 순간 체력이 다해 고꾸라지고 마는 사람. 반면 아빠는 엄마와 반대성향을 갖고 있다. 차분하고 매사 조심스럽다. 늘 심사숙고다. 하지만 결정을 하고 나면 돌아보지 않는다. 선택 후에는 본인의 선택을 맞게 만들려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 힘들어도 너무 끝까지 참아서 본인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사람. 그래서 아빠는 아무리 속상하고 아파도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몸져눕지 않는 이상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는 알기 어렵다. 


그래서 아빠의 힘듦은 늘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힘들다.”란 말을 하지 않으니 나는 아빠의 하루를, 삶을, 생각을 상상한다. 나는 아빠가 아니니까. 아무리 아빠를 사랑해도, 열심히 상상해도 아빠의 진짜 마음과 정확히 들어맞진 않겠지. 하지만 맞고 틀리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아빠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아빠도 한 명의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찬찬히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어릴 땐 엄마와 식성도 비슷하고, 함께 시간도 많이 보내서 성향도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대 후반쯤 되어 깨달았다. 내가 가진 성향 중 많은 부분이 아빠와 더 똑 닮았음을. 유난할 정도로 느끼는 책임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에너지가 회복되는 내향성, 말보다 글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걸 선호하는 소통 스타일까지. 그리고 하나 더. 사서 걱정하는 것. 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 파장을 남들보다 더 멀리까지 더듬어본다. 이 일로 인해 생길 경우의 수를 헤아려 보고 대비하려고 애쓴다. 설렘과 기대로 벅차오르기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것에 더 익숙한 사람. 아빠와 난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가 아프면 아빠가 더 걱정된다. 엄마는 아프면 병상에 누울 수 있고 그나마 살핌을 받을 텐데. 아빠는 어쩌나. 아빠의 걱정은 소리 없이 머릿속에서 저 멀리까지 달려가고 있을 텐데. 하루 만보를 채우겠다고 걸어가는 왕복 40분 남짓의 출퇴근길에서, 아침에 스트레칭을 하고 성경책을 읽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걱정을 하고 있을까.


추측해 보자면... 아니, 아빠가 하는 걱정에 대한 짐작은 내려놓고.

나는 이런 경우의 수들을 떠올렸다. 


경우의 수 1. 

엄마가 코로나에서 회복되지 않아서 계속 아프다면, 회복된다고 해도 갑자기 기가 꺾이는 노인처럼 털썩 약해진다면, 어떨까. 그럼 아빠는 엄마를 병간호하며 여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간병인을 쓸 수도 있겠지. 간병인을 쓴다 해도, 나날이 약해져 갈 텐데. 그럼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경우의 수 2. 그렇게 아빠 혼자 남게 된다면. 아빠는 엄마의 빈자리를 얼마나 자주 느끼게 될까. 30년도 더 함께 지냈는데,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았는데,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여기까지 상상하다 상상을 멈췄다. 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너네 아빠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엄마는 말하곤 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저 미소 정도만 짓는다. 엄마 말대로 아빠는 걱정이 많은 게 탈이지만 그래서 우리 세 여자(엄마, 언니, 나)가 아빠를 믿고 의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 점이 아빠를 믿는 구석 중 하나 아니었으려나. 어쩌면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아빠의 걱정을 믿고 마음 놓고 더 명랑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상상해 본 적 있는 액션 플랜을 가동할 테니까. 플랜이 없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우리 집 세 여자는 그만큼 어떤 상황에도 해결사가 되어 줄 아빠를 믿었다. 그래서 아빠는 더 무거운 가장의 무게를 짊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기댓값은 때론 감당하기 벅차니까.


오늘도 엄마와 통화했다.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듣는 아빠는 출근했다는 말. 엄마의 안부를 묻고, 다정한 말들을 하다 통화를 마쳤다. 아빠에게도 전화를 해볼까. 아빠는 좀 어떻냐고. 당연히 괜찮다는 답을 듣겠지만 아빠를 살피고 싶다. 헤아려보고 싶다. 사실 아빠는 나만큼 걱정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하는 이 모든 생각들은 나만의 걱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그냥 내가 토로하고 있는 이 걱정은 다 사랑 아닌지. 자꾸 걱정되는 마음에서 발견하게 된 건 결국 사랑인 것 같다. 받는 사랑이 아니라 보내는 사랑. 사는 동안 평생 부모님께 받는 사랑이 더 클 테지만 나도 아빠와 엄마를 향해 사랑을 보낸다. 오늘은 아빠에게 조금 더 큰 사랑을 보내고 싶다. 아빠. 잘 받아.


언제쯤 찍었더라... 우리 아빠 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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