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eneuve d'Ascq - 내가 도착해야 할 도시의 이름이었는데 당시에는 당연히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도 몰랐다. 빌노브다스크는 프랑스 북부의 중심도시인 릴의 위성도시 중 하나인데 거대한 규모의 대학 컴퍼스와 기숙사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아무튼 나는 유학 에이전시에서 인쇄해 준 A4 용지 몇 장을 들고 파리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그리고 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타기 위해 파리 북역으로 향했다.
테제베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릴 메트로폴 역에 도착하긴 했는데 전철로 갈아타고 기숙사가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40kg의 대형 캐리어를 끌고 꽤 오랜 시간을 헤매다가 결국 캐리어의 바퀴가 부서져 버렸다. 나는 할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겨우 기숙사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신기한 부분이 바로 유럽 초행길에 공항에서 기숙사까지 혼자서 찾아간 부분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영어를 알아듣는 프랑스인이 거의 없어서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파리도 아닌 지방이라 더욱 심했다.
택시기사와 어떻게 대화를 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초저가의 비용 때문에 염려했던 기숙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크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1인 1실이고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지만 큰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샤워실과 화장실이 남녀공용인 점이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워낙 다들 자연스럽게 생활하다 보니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기숙사는 릴1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캠퍼스의 규모가 그야말로 거대했다. 캠퍼스 안에 축구장만 6개 그리고 테니스장은 수십 개가 있다고 들었는데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다 둘러보진 못했던 것 같다.
기숙사 방 창밖으로는 끝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으며 하루 종일 쳐다봐도 한 명 또는 두 명 정도 지나갈 정도로 한적하고 또 굉장히 조용했다.
한 번은 기숙사밖에 나가 창쪽으로 무작정 끝없이 걸어가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들판을 걷고 또 걷자 넓은 승마장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릴이 떠오를 때마다 그 끝없는 들판이 기억난다. 나는 그 끝없는 들판을 걷고 또 걸었으며 또 드넓은 캠퍼스를 아무 생각 없이 걸었던 것 같다.
타렉이란 녀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인사만 주고받던 옆방의 중국인 유학생의 친구의 친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튀니지 출신의 유학생이었고 아랍인이지만 어머니가 이태리계라서 아랍인과 유럽인의 중간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문화에 심취해 있는 상태였다.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아랍어를 할 수 있었고 한국어와 일본어를 배우는 중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자 녀석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악수를 청했다.
프랑스에서는 친구와 만나게 되면 악수를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고 또 반갑게 악수하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 되었다.
이성친구를 만나게 되면 양쪽 볼에 뽀뽀하는 시늉과 소리를 내면서 비쥬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타렉은 커다란 하드디스크를 들고 기숙사 방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주고받기도 하고 기타가 있으면 기타를 치고 피아노가 있으면 피아노를 치며 지내고 있었다.
또한 외국인 친구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많이 해봐서 그런지 몰라도 가르쳐주는 것에 굉장히 능숙했다.
처음에는 어설픈 영어로 간신히 대화를 나눴지만 3개월 후에는 분명히 프랑스어로 대화할 것이라고 녀석은 장담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녀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의 프랑스 생활은 훨씬 더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는 아랍인으로써 매일 기도를 올렸으며 라마단 기간이 되면 먹지 못해서 정말이지홀쭉해지곤 했다. 하지만 깊은 관계에 있는 프랑스인 여자 친구가 있었으며 나와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내가 실수로 줬을 때는 맛있게 먹고 난 뒤 모르고 먹은 것은 괜찮다고 넘어갔다.
나는 타렉 덕분에 아랍인과 이슬람교에 대한 많은 편견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야기를 하다가 세계사 이야기가 나오면 나와 타렉의 세계사 지식 차이가 어마어마한 것이 드러났다. 타렉은 한국인들 대다수가 동아시아 이외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며 핀잔을 주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라비아 숫자라고 알고는 있지만 아랍인들이 숫자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에게 배울 것은 프랑스어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한국인과 일본인만 그렇게 몸이 닿도록 씻고 또 씻는다고 물 아깝다고 거세게 비난하며 자연스럽게 손으로 식사를 했다. 나는 조금 미안해하면서 손으로 먹다가 눈치를 보며 포크를 가져다가 먹곤 했다.
기숙사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오셩Auchan이란 대형마트가 있었는데 종종 타렉과 함께 가곤 했다. 가끔은 전철비가 아까워 걸어가기도 했는데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타렉은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재료로 꽤나 괜찮은 요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파스타면과 소스를 판매하는 바릴라라는 이태리 브랜드도 이때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먹는 중이다.
릴 근교의 투쾅Tourcoing이란 도시에 한국에서는 보자르라고 불리는국립 미술학교가 있었다.
전철로는 40분 정도 걸리고 트램으로 1시간 정도 걸렸는데 창밖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 천천히가는 트램을 자주 탔던 것 같다.
프랑스에는 대부분의 지역에 미술학교가 있고 지역주민을 위한 아뜰리에 코스가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수강료는 1년에 대략 300유로 정도로 매우 저렴했다. 당시 나에겐 큰돈이긴 했지만 큰 맘먹고 등록을 해서 미술수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도 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