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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브 Feb 01. 2024

프랑스에서 400일 - 4)미술학교





프랑스에는 대부분의 지방에 골고루 국립대학과 국립미술학교가 분포되어 있었는데 릴의 북동쪽에 있는 투쾅 Tourcoing 이라는 작은 도시에 미술학교가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미술에 관심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석고기둥만 수백 장 그리는 입시미술은 자신이 없기도 하고 추상화나 설치미술이 주류가 되어버린 현대미술에 오래전에 실망하여 미대 진학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프랑스 미술도 추상적인 표현이나 설치 미술 쪽으로 가는 경향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관심을 갖게 되어 틈날 때마다 미술학교 근처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투쾅국립미술학교 ERSEP (Ecole Regionale Superieure d'Experssion Plastique de Tourcoing)


그리고 어느 날 아뜰리에 수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한국에 비교하면 평생교육원 같은 것인데 별다른 입학과정 없이 지역주민들에게 개방되는 공개강좌과정이었다.


한 학기 등록금이 300유로가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환율로 40만 원도 안 되는 돈이지만 당장 아무런 수입이 없는 나에게는 굉장히 큰돈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맘먹고 등록을 하게 되었다.


덜컥 등록을 하고 보니 아크릴물감과 종이를 사야 했고 기숙사인 빌노브다스크에서 투쾅까지 교통비마저 부담이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미술학교 수업을 기 위해 꽤 많은 투자를 했던 것 같다. 물론 투자할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첫 수업은 크로키 수업이었는데 누드 크로키였다. 그때는 아직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누드 크로키인 줄은 몰랐고 아마도 크로키란 단어만 보고 등록을 했던 것 같다.


수업 첫날 강의실에 앉아 교수님이 들어오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웬 여자분이 강의실에 들어와서 몸을 두르고 있던 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나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마도 내가 그때까지 본 여성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느꼈던 기억이 난다.


온몸 흰색 페인트를 뒤짚어쓴듯 새하얗 빛나는 피부와 옅은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천사 같은 모습이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옷을 벗고 있음에도 그 형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보니 뭔가 선정적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프로답게 온몸 구석구석을 그릴 수 있도록 조각 같은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활짝 열어서 모두가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종이에 담는 것에 열중했다.


나는 열심히 크로키를 그리면서 미술학교를 등록하길 잘했으며 또한 프랑스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다른 수업은 몰라도 누드 크로키만큼은 절대 빠지지 않던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수업만 외모가 뛰어난 모델을 섭외하고 그다음부터는 현실적인 외모의 모델들을 섭외해서 수업진행었다. 점점 결석률도 높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사람은 다 똑같다.


누드 크로키 습작중 하나


크로키도 좋았지만 아크릴 페인팅 수업도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게도 그때는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물을 좀 더 섞어서 하라는 Un peu d'eau 란 간단한 도 이해하지 못해서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에서는 어학원 학생이다 보니 언어가 부족해도 다들 이해해 주었지만 미술학교에서는 나를 제외하고 대부분 프랑스인이었다. 


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가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숙사에서 미술학교까지는 전철로 대략 40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철 말고 트램으로도 갈 수 있었다. 트램은 조금 느리지만 마을 모습을 구경하기에 좋았기 때문에 트램을 타고 다녔다.



릴 광역도시 트램


가는 길에 Lac de Heron 이란 거대한 호수와 목장이 있었는데 가끔 들려서 구경하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수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이 신기하다.



프랑스 미술학교의 정규과정은 작품을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 내는 것보다 무엇을 어떻게 왜 표현하는지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프랑스의 수능인 바칼로레아에서도 철학적인 질문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것처럼 미술에서도 철학적인 사고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중요시했다.


만약에 나이가 아주 어릴 적에 갔다면 아마 어떻게든 정규과정에 입학해 볼 생각도 했겠지만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고 가다 보니 언어적인 과 여러 가지로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두려워서 입학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프랑스에 온 것이 유학을 온 것이 아니고 아주 긴 세계여행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아뜰리에 과정이 꽤나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기말에는 학생 작품 전시회를 열어서 나름대로의 결과물도 완성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덕분에 나도 그림 몇 개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한국으로는 가져오지 못했다. 그중 하나가 사진으로 남아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사진으로 남은 유일한 나의 아크릴 작품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후회되는 것들도 있지만 미술학교 아뜰리에 수업은 조금도 후회가 없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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