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빌리브 Jun 16. 2024

프랑스에서 400일 - 10)Leaving Paris



결국 프랑스를 떠나는 날이 다가오게 되었다. 

파리서의 생활이 아직 충분하다고 느낀 건 아니지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몇 달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다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밟는 데까지는 5년이란 긴 시간이 걸리기는 했다.


파리 살게 되면 적응하는데 몇 달의 시간이 걸 수 있지만 일단 적응하게 되면 파리의 매력을 부에 와닿게 느끼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 내 안의 어딘가로 흡수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의 기운도 파리에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고국으로 돌아가 원기를 회복하는 일이 꼭 필요하고들 했다.


파리에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에게 들은 것인데 그는 꼭 한겨울에 한국땅을 밟는다고 한다. 물론 파리도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지만 엄청나게 춥지는 않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출구를 나가면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짜 미칠듯한 추위가 그렇게 반갑다고 했다.





한국으로 가져갈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구매했던 14인치쯤 되는 브라운관 TV를 비롯해서 전기밥솥과 살림살이를 처분해서 귀국하는 비행기표를 사는데 보탰고 릴 Lille 에서 그렸던 그림 3개 중 마지막 남은 1개는 그냥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다. 나중에 한국에 가서 다시 그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다시 붓을 잡게 되진 않았다.


그나마 사진이라도 찍어둔 것이 다행이다. (4회 미술학교편 참조)



A4 용지 반만 한 크기의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다가 가끔 크로키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것은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림은 릴에서 자주 가던 호수 공원에서의 흰 소들의 모습.



le Vin Qui Danse (The wine who dance) 몽마르트르살 때 집 근처에 있던 와인바인데 가게이름이 춤추는 와인이다. 춤추는 것은 와인이 아니 사람일 텐데 와인에게 덮어 씌 버렸다. 나중에 만약 와인바를 차리게 되면 쓰려고 사진을 찍어뒀다.





10회로 획한 글드디어 마지막 회를 쓰게 되었다. 귀국한 것이 2007년 가을이니 무려 17년 전의 이야기인데 2022년 가을이 돼서야 쓰기 시작해서 2024년 여름 드디어 마지막 회를 쓰고 있다. 이 늦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뿌듯하고 왠지 감사하고 또 자랑스럽.


사실 글을 완성한 다음에도 오랜 기간 여러 번에 걸쳐 수십 번 고치다 보니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글이 된 것도 있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나 파리에 대 지나치게 과한 애정이 담긴 부분은 거의 다 삭제했고 9회에서 있었던 남녀 간의 이야기 부분도 볼수록 민망해서 거의 다 걷어내 버렸다. 물론 기억이 희미한 것은 사실이긴 하다.


400일 만에 프랑스를 떠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것도 썼다가 삭제한 부분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런던으로 이사하려다 문제가 생겨서 가지 못했고 아예 유럽 대륙을 벗어나 캐나다 토론토까지 날아갔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때는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2009년 가을에 어머니를 모시고 2주 정도 파리와 남프랑스를 여행했다. 리고 2012년 여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5년 만에 다시 파리에 었다. 하지만 겨우 100일 정도 머무르다가 다시 귀국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여행으로 몇 번 더 들리게 되었다.



파리를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예술분 종사하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그곳에서 직장을 다니며 나의 커리어를 발전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던 것 같다. 내가 일해온 IT분야는 프랑스보다는 한국이 훨씬 앞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여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다보니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게 살아가야 하는 분위기가 나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이미 한국의 밤문화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적막한 유럽의 밤거리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많은 일을 겪고 국으로 돌아온 나의 모습은 그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실상 내 인생은 프랑스에 가기 전과 다녀온 후로 나뉘는데 그 이야기에 관해서도 써보고자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회사생활을 하다가 경제학에 관심이 많아져서 석사과정을 준비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학원을 알아보게 되면 서울 내의 학교들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 다녀온 후의 나는 자연스럽게 파리의 대학들과 근처 유럽권의 대학들을 포함해서 가본 적도 없는 미국의 대학까지 알아보게 되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마 프랑스에 가지 않았다면 쉽게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냥 국내 대학으로 정하긴 했지만 프랑스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긴 했다.


또한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겨 한국을 떠나게 되면 언제든지 편하게 갈 나라가 있다는 것이 의외로 뭔가 여유를 갖게 되는 점이 있었는데 나중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면 아마도 많은 시간을 파리와 릴에게 보내게 될 것 같다.




사실 가장 내가 잘했다고 느끼는 점은 릴 Lille 에서 생활했던 경험이다. 수입도 없고 가지고 간 돈도 거의 없었던 나는 반강제적으로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거주는 기숙사에서 해결이 되었고 옷은 안 사면 되고 남은 것은 식비였다.


나는 가난했던 중세 유럽의 서민처럼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물론 고기도 사 먹긴 했지만 아주 적은 양의 고기를 사서 몇 번에 걸쳐 나눠먹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해도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한 달에 전체 지출액이 10만 원이 되지 않았다. 옷을 사지 않으니 남루하고 헤어 스타일도 깔끔하지 않고 전화는 받기만 하고 버스나 전철대신 걸어 다녔지만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을 2014년경에 서울에서 급작스럽게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된 나는 자연스럽게 재연하게 되었다. 생전처음 카드론을 쓰게 되위기감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한 달간 용돈으로 쓴 것은 편의점에서 사용한 4200원이었으며 대출이자를 제외한 모든 지출액을 합쳐도 10만 원이 되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거의 습관적으로 매일 몇 번씩 사 먹는 커피를 단 한잔도 사 먹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조금도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몇 달 만에 카드론을 다 갚고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때 느낀 정은 뿌듯함을 넘어 앞으로의 삶에 대해 뭔가 확고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꼭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였어도 상관없을 수 있겠지만 검소함이 몸에 베인 프랑스인에게서 배워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바게트를 사다가 하루종일 물과 바게트만 먹어보곤 한다. 른 사람에게 물어본 적은 없어서 다들 어떤지 모르겠지만 쌩바게트만 먹어도 진짜 맛있긴 하다.





2년 만에 이야기를 마치게 되었지만 사실 약간 급하게 마친 부분이 있다. 작년에 칠순이 넘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뉴욕에 다녀온 이야기를 까먹기 전에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뉴욕은 2012년에 파리-뉴욕 노선으로 혼자 처음 갔었고 부모님을 모시고 간 것은 세 번째로 간 것인데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이 넘치는 도시이긴 하다.



뉴욕에 대해 어떻게 잘 써봐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쓰다 보면 써지는 것이 신기하긴 하다.



이전 09화 프랑스에서 400일 - 9)몽마르트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