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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한 Jun 03. 2017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우스를 글쓰기 버튼에 갖다 대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쓰는 글이라 그래서 더욱 머뭇거렸던 듯하다. 글이 없었던 근 반년의 시간 동안에 나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활을 했을 뿐이었다. 정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이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와 쉬는 일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기말고사를 눈앞에 두게 되었고 종강은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데 돌아보니 남은 건 지나간 3개월뿐이었다. 남들 다 해봤다는 연애도 안 해봤고 취업하는데 중요하다는 인턴이나 대외활동 같은 경험도 지방에 산다는 핑계를 구실 삼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은 겁이 났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겁이 났고, 나의 결함을 들키는 것도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나만의 성을 견고하게 만들고 가꿔나갔다. 완성된 성은 매우 흡족스러웠고 남들이 보기에도 꽤 그럴듯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나 자신을 좀먹어간다는 걸 알지 못한 채 꽤나 오랜 시간 만족스럽게 지내왔다. 그러다 점점 나의 성에는 식량이 떨어져만 갔고 나는 식량을 구하러 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만들어 놓은 나의 세계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리가 없었다. 나의 세계는 기껏해야 흠집이 난 정도였으며 여전히 견고했다. 흡족하게 바라보았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나의 폐부를 자꾸만 욱신거리게 했다. 


"정말 온실 속의 화초 같아요."


 아는 사람의 지인을 만나서 들은 말이었다. 그 당시엔 그저 웃어넘겼다. 그때의 그 대화는 날 겨냥하려 했던 말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이야기가 아닌 그냥 가벼운 자리였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말만 기억 속에서 맴돌았다. 아무래도 나는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지나간 이십 대의 절반을 되돌아보는 요즘에 와서는 더더욱 그때의 그 말을 괜스레 곱씹어보게 된다. 


 얼마 전, 자신의 꿈에 대해 발표하라는 과제를 받고 완전히 멘붕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고 꿈이란 것은 애초에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나는 꿈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발표를 마쳤다. 꿈이란 걸 가져본지가 오래되었으니 나의 꿈에 대해 선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꿈을 선명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초라해졌다. 누군가는 그림에 채색을 시작하고 있는데 나는 도화지에 연필 몇 번 휘적거리다가 그나마도 맘에 들지 않아 지워버렸다. 그림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과연 나의 세계를 나의 힘으로 깨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지운 흔적이 전부였던 도화지에 채색을 마칠 수 있을까. 


 글을 써 내려가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선물로 받은 디퓨저의 향을 맡으며 글을 써 내려갔다. 아무것도 없던 나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면서 커피의 씁쓸한 맛으로 나를 달랬고 무엇이라도 만들어 나가야 하는 나의 미래를 떠올리면서 살짝 달큼한 디퓨저 향으로 다시 나를 달랬다. 나를 달랠 사람도 나밖에 없고 나를 달리게 할 사람도 역시 나밖에 없다. 결국은 오롯이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건 5년 전과 지금이 다르진 않지만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나야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이유인 걸까. 


그래도 오늘은 무언가를 했다는 것에 아주 자그마한 위로를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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