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집으로 와 16화

복구

by 준혜이

그동안 왜 이러고 살았지,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지, 반성하면 할수록 집이 깨끗해지는 초능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술한 벽을 하얗게 지우고 있다, 다 무너뜨리고 싶지만. 처음, 맨 처음 둘째가 벽에 그어놓은 선을 발견했을 때 아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귀엽다 할 게 아니라 벽에다 삿대질을 해가며 다시는 이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스스로 낙서를 지우게 해서 책임감이라는 걸 가르쳤어야 했는데. 둘째의 손이 닿을 리 없는 곳에 그려진 온갖 색의 하트를 하나, 둘 목격하고 아니, 우리 큰 애가 그리는 하트는 벌써 완벽해, 왜 큰소리로 감탄한 거야. 그렇다면 애들이 벽에 붙어있는 시간 동안 나는 무얼 했나, 가만히 있었지, 그땐 지쳐 미처 알지 못했지, 오늘만 사는 인간의 셀 수 없는 오늘이 다가오는 내일에 꾸준히 빚지고 있었다는 걸. 그 빚은 이자 없이도 갚기 버겁다고요.

좋아하는 요가 바지를 제자리걸음으로 벗어 내리고, 페인트가 묻으면 다시 입기 싫어질 것 같은 티셔츠도 벗어던지고 페인트와 롤러를 들고 화장실로 결연히 입장. 화장실 벽은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그걸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다. 1. 아이들이 부엌 바닥에 앉아서 24색 물감 뚜껑을 하나하나 다 열어 종이 접시에 짠다. 2. 물기 없는 붓에 물감을 묻힌 다음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린다. 3. 종이에다가만 그림을 그리는 건 지루하니까 아이들이 자신들의 손에 물감을 빡빡하게 칠하기 시작한다. 4. 두 손으로도 모자라 팔꿈치까지 색칠한 후 왠지 거동이 불편해진 아이들은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간다. 5. 화장실 불을 켜자 새하얗던 스위치가 빨개지고 그걸 보고 신난 아이들은 화장실 벽을 한 번 쓰다듬어 본다. 6. 이 모든 소동에도 나는 꼼짝 않고 소파에 앉아 숨을 몰아 쉬다가 야!!!!!!!! 이걸 5년간 때때로 반복하면 화장실 벽이, 이 정도면 괜찮네.


카더가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화장실에서 속옷 차림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있자니 이건 마치 저질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하는 마음이 들면서 누군가 나를 좀 구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 왜 옷 안 입었어. 어, 옷에 페인트 묻을까 봐. 화장실 거울 옆 벽에 대고 롤러를 굴리는 거울 속의 나는 뭔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느낌만 빼면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페인트칠을 대충 마치고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노트북을 펼쳐 아주 오랜만에 요가 소년을 틀었다. 무리하지 않습니다. 내쉬는 숨에 정수리 바닥 가까이.

아파트 관리실에서 온 편지에는 우리가 이 집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상태로 집을 되돌려놓고 나가야 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아니, 그게 과연 합법적인 요구인가요? 하고 되묻는 답장을 쓰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집에서 보낸 세월을 돌이켜보면 양심의 가책이 상당히 괴롭게 느껴지는 바, 마음속으로 그냥 보증금은 포기합니다. 가지세요. 다음 세입자를 위해서 이 집을 변신시켜주세요, 해버린다. 그래도 보증금을 한 푼도 안 빠뜨리고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니까 오늘의 복구는 여기까지, 에어컨 돌아가는데 옷 벗고 페인트칠하면 추우니까 내일의 과거 세탁은 아직. 다음 주 수요일이 이사예요, 아, 예, 화요일에 밤새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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