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집으로 와 15화

바보

by 준혜이

집이 다 지어진 해부터 우리가 이 집에서 살 차례가 될 때까지 집주인이 바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아이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 다녀야 할 학교를 모두 졸업한 어른이 되고, 사는 내내 아이에게 어른이었던 어른은 어느 순간 나이 든 얼굴로 가끔씩 자식을 흠칫 놀라게 하고, 그보다 더 자주 미안하게 만드는 노인이 되었을까. 한 가정의 토막나지 않은 시간이 한 공간에 머물렀다 물러나는 자리에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집의 숫자를 세어보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열여덟. 7살 이후로 살았던 그 모든 집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나는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다. 어느 곳에서는 겨우 두 달을 머물고 나이 한 살을 먹은 기분이었고, 어딘가에서는 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듯하기도 했다.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넓은 땅 위에 사람들이 원을 이루고 모여 앉아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뒤에 앉아서 원을 둘러싸는 원을 만든다. 공중에서 누군가 두 개의 사람 원 위로 수건을 돌리고, 위에서 떨어진 수건을 손을 등 뒤로 해서 잡은 어떤 노인이 결국 요양원으로, 그 노인 뒤에 앉아있던 젊은이는 그 노인의 집으로 들어가 각자 남은 생을 이어나간다.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거나 가족일 수도 있고 원수일 지도 모른다. 노인이 젊은이에게 건네준 수건에는 돈 있어? 돈 빌릴 수 있어? 어쨌거나 다음은 네 차례야,라고 쓰여있다. 다행히 이번이 우리 차례. 가난에 대해서는 말할 자격이 없고, 부에 관해서는 감각이 없는 우리의 매입. 나는 사는 곳이 바뀌는 것뿐인데 이번 이사를 마치고 나면 한꺼번에 스무 살을 집어먹게 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있다.


우리에게 집을 판 할아버지의 연세는 여든 하나, 지난 10년간은 집에서 혼자 생활하셨다고 한다. 두 번째로 이 집을 보러 갔던 날, 앞으로 우리 이웃이 될 할머니가 우리에게 다가와 40년간 이 집의 전주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창문이 끝까지 내려간 하얀색 SUV 운전석에 앉아 다정한 얼굴로 말하는 이 할머니도 언젠가 집에 혼자 남아 이제 내 차례인가, 하면서 등 떠밀리듯 오랫동안 정든 집을 정리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그토록 바라는 정착이 이 세상 어느 집 구석에도 없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침에 눈 떠지면 방황하고 정착은 무덤에서나, 우리의 정체성은 삶이 아니라 죽음에. 아니, 마음에 무덤을 품고 세상을 방황하면 우리의 정체가 삶이자 죽음. 이것은 재산이 생긴 내가 감격에 겨워 미리 남겨보는 유언인가, 뉴저지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불러보는 장송곡인가.


집안의 가구마다 붙여진 포스트잇에는 버릴 것이나 가지고 갈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대부분이 버려질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끝난 자리에서 시작될 모든 것이 바꾸어 놓을 우리를 기대한다. 마지막까지 버릴 것과 지킬 것을 구별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 어제, 여기, 지금, 저기, 내일이 사실은 따로 이름 붙여 구분할 필요 없이 하나였다는 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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