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집으로 와 17화

이사하는 날

by 준혜이

이사하기 전날 밤 나는 밤을 새웠다. 그렇다고 단 한 숨도 자지 않은 건 아니고 새벽 다섯 시쯤에 허리가 아파 잠깐 눕는다는 게 짧고 깊은 잠이 되어버렸다. 나는 밤새도록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 낙서가 눈에 띄면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미처 상자 안에 담지 못한 물건을 발견하면 거실 계단 아래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납작한 상자를 집어 들어 입체적으로 접은 다음, 테이프를 붙이고 그 안에 넣었다. 일의 순서나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집안을 쉬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닐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두 손이 내 몸 같지 않다 느끼면서.


이런 일을 일 년에 한 번씩 반복하면서 살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일 년의 시간을 상자에 담아 여러 번 옮기는 일과 오 년의 세월을 버리고 쓸어 담아 한 번에 떠나는 일 중에 무엇이 더 어려울까, 하면 대답하기가 쉬웠다.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사람들, 버려야 할 물건들, 냉장고 속의 유물들. 일 년이면 이 모든 것들이 갓난아기처럼 작고 가볍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사 전 날 이른 저녁부터 숙면을 취한다 해도 상관없을 테고 말이다.


이삿짐센터 아저씨가 아침 일찍 우리 집에 도착하고 난 뒤로는 이사가 순서대로, 계획대로 진행되어가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잠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전날 밤처럼 두 손을 생산적으로 움직여 냉장고 정리를 할 수 없었다. 아, 정말 이사하네, 이 말만이 시끄럽게 울리는 마음으로 나는 주저하고, 머뭇거리면서 냉장고 속에서 노래했다. “조금만 지나면 그대와 약속한 그날이 되어요 정말로 우리 내일이면 이별하나요” (박정현, 전야제) 친구 한 명이 집에 와서 우리의 이사를 도와주는데 나는 그게 고맙고 어색해서 친구에게 지금 자신의 수명을 우리 집에 낭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낭비라니 나는 지금 투자를 하고 있는 거야, 라는 그의 말에 마음이 뜨끔했다. 그러면 우리는 지난 오 년간 어디에 우리의 수명을, 시간을 투자해온 거지? “그대여 미룰 수 없나요 우리 이별해야 하는 날 내일은 눈물이 멎기엔 너무 이르죠” (박정현, 전야제)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올해 초에 이사를 했을 것이다. 남편의 재택근무 덕분에 우리의 이사 준비 기간은 6개월이 넘었고, 그 시간 동안 어쩌면 우리에게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될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러면서 나는 떠날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오지 마. 이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가며 오늘과 비슷할 내일을, 내가 잘못해도 봐주기만 할 것 같은 사람들 곁을 깨끗이 포기하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어쨌거나 우리 집은 빈 집이 되었고 이 집에서 이삿짐에 시달리며 보낸 시간은 일단 끝이 났으니 보스턴으로 떠나는 차 안에서 얼마 동안은 마음이 후련했다.


어른들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잘 가라고. 한없이 다정한 어른들의 목소리에 나는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운전 중인 남편에게 내가 그동안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뉴저지를 떠나는 게 싫었다고 해서 남편과 말다툼을 벌였고, 울면서도 부산 국밥에 전화를 걸어 돼지 국밥 세 개, 순대국밥 세 개, 모둠순대 하나, 수육 하나를 주문했다. 왜냐하면 보스턴에는 맛있는 한국 식당이 별로 없다고 하고, 보스턴 집에 가면 캐나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신 시부모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말이다.


나 혼자였으면 겪지 않았을 이 모든 일들을 우리 인생이라고 이름 붙여 살아갈 나, 이제부터는 더 내가 아니라 우리로, 그렇지만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는 우리로, 더 이상은 그 누구도, 그 어디로 떠나지 않아도 되는 내일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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