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집으로 와 22화

이웃

by 준혜이

우리가 이사 들어온 다음 날 오후, 옆집 할머니는 직접 구운 브라우니 한 접시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생각해보니까 우리는 뉴저지의 옆집, 앞집 사람들에게 이사 간다는 말도 없이 이사를 해버렸다. 어쩌다 현관문 앞에서 마주칠 때나 겨우 인사를 나누는 사이이긴 했지만 이런 일에는 평소보다 자세히 인사를 해야 예의 바른 어른이지, 뒤늦게 반성을 해본다. 저희 이사 가요, 잘 지내세요. 이 말 한마디 전하는 게 뭐 그리 쑥스럽다고. 우리는 식탁 한가운데 놓인 옆집 할머니의 브라우니를 둘러싸고 앉아 그 따뜻한 초콜릿 향기를 맡았다.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브라우니를 다 먹어치우겠다는 결심과 함께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분홍색 장미꽃 두 다발을 사들고 옆집 할머니 집 초인종을 눌렀다. 개 짖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을 연 할머니는 꽃을 든 우리를 보자마자 이럴 필요 없는데 하면서 포옹하듯이 두 팔을 꽃다발로 뻗었다. 할머니의 남편은 2년 전에 돌아가셨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였으며, 헝가리인이라고 다. 딸 둘과 아들 모두 결혼해서 자녀를 두고 있어 할머니에게는 아홉 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나는 한국 사람, 남편은 몬트리올에서 태어나고 자란 캐나다인이자 한인 이민자 2세, 딸아이는 캐나다에서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우리는 닫힌 현관문 앞에 서서 자세하게 서로를 소개했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는 남편의 말에 할머니는 그러면 불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자신의 첫째 딸은 스페인어를 둘째 딸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덧붙였다.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언어에 소질은 없지만 교환학생으로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할머니의 남편이 자녀들에게 헝가리어를 가르치고 싶어 했지만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시작되자 어려운 일이 되었다고 한다. 모국어가 헝가리어라니 그건 미국 가정에서 한국어보다 살아남기 힘든 언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읽어보셨나요? 할머니의 모국어는 헝가리어가 아닌가요?) 우리는 닫힌 현관문 뒤로 새어 나오는 개 짖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할머니에 대해서는 이름 말고는 들은 바가 없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일인용 의자가 도착했다. 혼자 낑낑대며 상자를 집 안으로 옮기려는데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던 옆집 할머니가 도와주겠다며 강아지 목줄을 소화전에 묶어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상자를 우리 집 거실에 내려놓고, 나와 아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 옆집 할머니의 강아지와 놀았다. 초콜릿 색의 곱실거리는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두 발로 서면 머리가 내 어깨까지 올 정도로 몸집이 큰데 태어난 지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강아지의 이름은 모네. 화가 이름인가요? 하고 내가 묻자 할머니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모네 그림 앞에서 남편과 처음 만났다고 고백했다.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손에 쥐고 있다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할머니는 모네의 이름을 남편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강아지와의 산책을 다시 시작하며 할머니는 우리에게 나중에 또 보자고 손을 높이 흔들어 인사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할머니의 죽은 남편에 대해서 알게 된다.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다른 사람의 말로 배우고 내 나름대로 상상해본다. 할머니의 기억과 나의 생각으로 할머니의 남편은 우리가 만나기 전에는 될 수 없는 사람으로, 이야기로 새로 태어난다. 낯선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만한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할머니의 남편, 가까운 사람 하고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경험으로서의 할아버지가 한 사람은 아닐 텐데 할머니에게는 다 같은 사람이거나 자기 자신일 거라 생각한다.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하루를 평생처럼 지내고 있어. 죽은 사람과의 추억 속을 헤매다 두 사람이 되어 남은 생을 살아가는 일을 보고 있어. 이건 그냥 한 번 해보는 개소리가 아니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의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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