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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Jan 11. 2022

언제나 제정신

   피아노 학원 앞 공공 쓰레기통 앞에 서서 딸아이의 손톱을 깎아주었다. 딸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에게 벌써 두 번이나 아이의 손톱을 바짝 깎아주라는 당부를 들었기 때문에 세 번은 싫었다. 추위와 긴장 속에 아이의 단단한 손톱을 깎아주며 역시 나는 나 하나로도 살기 버겁다고 느끼다가 한겨울에 길거리 쓰레기통 앞에 둘이 서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입김을 뿜으며 웃었다. 엄마, 왜 웃어? 아니야. 엄마, 빨리해! 아이는 왜 여기저기 골고루 균형적으로 자라지 않는 것일까. 계란 프라이를 해서 혼자 밥을 차려먹으면서, 손톱은 스스로 깎을 수 없다 하고, 쇼핑몰에 가면 아동복은 들여다보기도 싫어하면서 왜 가끔 속옷을 거꾸로 입고 있다 나한테 들키고 마는지. 아무려나. 어머, 손톱 깎아야겠네, 하고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언제나 제 자리에 놓여있는 손톱깎이를 집어 들고 바로 손톱을 깎는 건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가 문제라면 문제겠지. 손톱이란 별일 없는 하루를 내다 어느 순간 아니, 내 손톱이 언제 이렇게나 길어진 거지. 마지막으로 손톱을 깎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하는 일 없이 손톱만 이렇게 기르다니. 이참에 길러볼까? 쌀 씻을 때 손톱에 쌀알이 끼면 더럽고, 아파. 집에 손톱깎이는 있나? 차에 있나? 이런 생각 끝에 깎지 않고 잊는 것이다.   

   

   술 취한 스무 살의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오빠 손톱이 왜 이렇게 길어요, 제가 손톱 깎아드릴게요. 그리고 당장 어디선가 손톱깎이를 구해  나는 그 오빠의 손톱을 하나하나 정성껏 잘라주었다. 우리는 엠티를 온 거였다. 손톱깎이를 내가 누구에게 빌렸는지, 다 쓰고 돌려줬나, 잘 모르는 오빠의 잘린 손톱들은 어떻게 잘 모아서 버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오빠는 머리카락도 길어서 옆에 가까이 앉으면 비누인지, 샴푸인지, 로션인지, 빨랫비누, 향수인가? 하는 냄새가 났다. 누구에게도, 술 취한 저 여자애가  남자의 손톱을 깎아주면서 유혹하고 있어, 라는 오해는 받지 않았다. 그런 오해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불현듯 스스로 깨달았다. 깔깔깔

    

   밤에 손톱 깎으면 안 돼. 혹시 그랬다면 깎은 손톱을 절대 아무 데다 버려서는 안 돼. 쥐들이  네 손톱을 주워 먹고 수많은 네가 되어 세상에 진짜 네가 누군지를 헷갈리게 하고 말 거야. 내가 좋아하는 어떤 전래동화책에 나오는 얘기야. 손톱 깎고 쓰레기통에 잘 버리라는,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를 줄여주려고 어떤 효자가 지어낸 이야기 같아. 아니, 그러면 이거 손톱 아무 때나, 아무 데나 못 깎게 하면 엄마한테 가짜 자식만을 남기고 진짜는 도망치겠다는 협박 아니야? 내가 하나라서 진짜라고 생각해? 손톱은 열 개다. 나는 때마다 삼십 개의 손톱을, 삼십 개의 발톱을  잘라야 한다. 20년 전 내 옆에 앉아있던 손톱 긴 그 남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내가 정말 너무 나이 들었다고 낙심하려는 찰나, 그 오빠의 이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너는, 애도 없던, 남자 친구도, 자아도 없던 내게, 모성애를, 지저분하게 긴 손톱으로, 자극했어.

   피아노 레슨이 끝났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는 순간, 언제 이렇게 손톱이 길었지, 아까 딸아이 손톱 잘라주고 나도 자를 걸 그랬나, 지금 주머니 속에 손톱깎이 있는데, 한 번 길러볼까, 집에 도착하면 잊어버리겠지, 내일까지 거슬리면 아침에 애들 스쿨버스 기다리면서 잘라야지. 언젠가 내 손톱을 잘라주며 날 유혹하는 남자에게 내 발톱까지 바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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