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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Jan 26. 2022

달리기

   오후 4시 반. 아이들을 차에 태워 태권도장으로 가는 길에는 동네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교통 표지판처럼 군데군데서 달리고 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운전 중에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여긴 삶의 질이 높은 곳이야, 아니, 달리기가 취미인 청소년들이라니! 아우, 깜짝이야, 해지면 좀 뛰지 마라, 하는 생각이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옷차림과 머리카락으로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 들었는지, 어린 지 구별할 수 있었던 여름에서 아무리 다른 옷을 겹쳐 입어도 똑같이 추워 보이는, 셀 수 없는 몸과 입김이 되어버린 달리기의 겨울로 어느샌가  남편이 끼어들어 쉬지 않고 달린다. 오빠, 달려. 앗, 이건 아닌 것 같은데 ㅋㅋ

   보스턴 하면 보스턴 마라톤이지. 우리는 보스턴 마라톤 테러가 일어났던 그 해 여름에 테러범이 차에 기름을 넣었다는 주유소 건너편 아파트에 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렸다는 찰스 강변을 나는 두 살짜리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거닐며 거의 매일 학벌이란 무엇일까, 대학은 도대체 왜 다녔나, 학비 아깝게, 라는 생각에 빠져 지냈으며, 남편은 대부분의 보스턴 스포츠팀을 좋아하지 않아, 아무리 애를 써도 외면하기 힘든 고속도로 옥외 광고판을 향해, 이 도시에서 살 일은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으리라, 누군가의 멱살을 잡듯 운전대를 붙잡고 자주 선언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어디 있니. 입이 방정이라면 나는 이곳에 뼈를 묻겠어. 한국에서 한 2년쯤 살다 오는 건 정말 말도 안 될 일이야.    

   나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아침마다 남편은 집 밖으로 뛰쳐나가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은 자신이 달리는 경로와 거리, 시간이 기록되는 앱을 사용하고 있다. 그 앱을 쓰는 사람들이 달린 기록을 앱 사용자들에게 공개하기도 한다고 남편이 나에게 말하며 보여준다.  사람들은 늘 비슷한 곳을 규칙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거 보고 누가 따라가서 나쁜 짓 하면 어떡해? 그러네.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남자였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왠지 그 남자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건전하게 방황하는 불쌍한 정신들. 그러니까 내가 이른 새벽부터 어디 몰래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나서 꼭 안아줄게. 아니, 제발 아침에 알람 울리면 5분마다 스누즈 누르지 말고 침대에서 몸이나 재깍 일으키라고.

   남편은 올해 안에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얘길 들으면 얘가 나랑 너무 달라서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우리 정말 이것저것 하나도 안 따져보고 사랑해서 결혼했네, 끼쳤던 소름이 잦아들려다가 더 촘촘히 솟아오른다. 어디서 백지영 목소리 안 들려요? 이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 같은 사랑. 나를 만나기 전에 딱 한 번 마라톤 대회에 나가 완주한 적이 있는 남편이 말했다. 마라톤을 다 뛰고 나면 몸에서 달걀 썩는 냄새가 나고 소변볼 때 진짜 아파. 그렇다면 기대된다, 너의 악취와 고통. 오빠, 달려. 뛰어봤자, 벼룩이다. 건전하게 방황하다 되돌아와 제 자리를 지키는 기특한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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