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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Jan 20. 2022

나쁜 말

   화장실 거울 속에서 나와 딸아이가 양치질을 하고 있다. 우리의 키 차이는 이제 겨우 5cm. 거의 매일 밤, 거울에 비친 서로에게 눈길을 주면서, 칫솔 든 손은 게으르게 움직이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주로 딸아이가 입에 거품을 물고 유튜브에서 본 재미있는 장면, 마인크래프트에서 누군가를 극적으로 죽이고 그 판에서 승리한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어, 그래. 헉, 정말? 반응하는 식의 대화이다. 그러다 드물게 우리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순간이 찾아오면 딸아이에게 그 얘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속히 입 속의 치약 거품을 에퉤, 하고 뱉을 수밖에 없다. 세면대로 고개를 숙이느라  얼굴이 거울 밖으로 빠져나간 그 찰나로부터 우리는 진지해지는 것이다.

   딸아이가 내 앞에서 욕을 한 적은 아직 없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욕의 존재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나에게 알려왔다. 같은 반의 누가 누구에게 한 욕, 놀이터의 어떤 오빠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혼자 그네를 타면서 허공을 향해 부르던 욕. 딸아이는 자신의 세상 속에 흘러 들어온 욕을 모아 나에게 소리 없이 뻐끔뻐끔 움직이는 입술로 보여주었다. 이건 정말 나쁜 말이라는 목소리를 덧붙여서. 너도 욕하고 싶어?라고 너그럽게 물었더니 딸아이는 나에게서 뒷걸음질까지 쳐가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나는 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사람 마음속에 생겨날 때가 있다고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욕을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도 했다. 3학년짜리 여자애가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사생활 없이, 엄마 앞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할 수 있는 말, 가질 수 있는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나에게는 첫사랑, 첫 키스보다 더 강력한 첫 욕에 대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뒷자리에 앉은 남자애가 시도 때도 없이 주먹으로 내 어깨를 때렸는데 그 애 이름도, 얼굴도, 머리스타일까지 여전히 기억난다. 이런 씨 X. 늘 교실에서만 날 괴롭히던 그 애가 그날은 집에 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책가방까지 매고 있는 내 어깨로 주먹을 날렸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가던 길을 전봇대 옆에서 멈춰 뒤돌아 서 그 애한테 이런 개 씨 X 새 X가 진짜! 그동안 내 귓가를 맴돌던 아이들, 어른들의 욕으로 만든 비명을 그 길에 있던 모두에게 질러버렸다.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에게 허락된 언어생활의 금기를 깨뜨린 뒤 오랫동안 나는 부모님 앞에서만 욕을 하지 않았을 뿐 대화의 추임새로, 공감, 모욕과 농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친구들과 욕설을 주고받았다.      
    
   이제는 아이들이 쓰는 욕의 뜻까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아나가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에게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친구들이 욕을 내뱉는 정황을 파악하라, 욕은 나쁜 말이지만 욕을 하는 사람이 전부 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 상대방을 상처 주려는 의도 없이 나오는 욕도 있다, 네 마음을 해치려고 작정한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나쁘게 쓴다, 단어를 많이 알면 욕을 하지 않고도 욕을 한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네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아이가 칫솔을 들고 서서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Fxxxing 한국말은 너무 알아듣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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