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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Feb 18. 2022

술 생각

   아이는 열한 살이 되었다.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게 된 걸 축하한다. 내 안의 미친년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며 자신만의 고유한 미친년을 창조해나가는 사춘기로 들어선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지만.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을 줄 알았지. 서서히 목소리를 높여가며 나 스스로 제대로 인식해 본 적도 없는 나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흰자위를 파르라니 얼려가며 짐승의 눈빛으로 나를 찌르는 . 아이의 도발에 생각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다 혹시 내가 지금 거울을 마주 보면서 싸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늦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진정하고 화해했다. 아이가 열한 살이 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딸아이를 다시 똑같이 한 번 더 낳고 싶다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듯하다. 이번에는 신생아가 아니라 전에 없던 혼돈으로, 이 세상에.

  그렇다고 우리가 갈등의 지뢰밭에서 조마조마한 일상만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은 스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딸아이가 목소리를 낮춰 반 아이들 중에 누구와 누가 서로 flirt 하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flirt인가, 하고 묻는 내게 딸아이는 잠시 침묵하다 cute하다고 서로에게 말하고 flirt 하는 거지, 대답했다. 너는? 딸아이는 몇 년 동안 남자아이들에게 낭만적인 관심은 없다고 불필요하게 일관적으로 내게 말해왔다. 남자 친구는 대학교에 가서 사귈 거라고 해서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중학교에서 배울 외국어 선택 1순위가 왜 중국어인지, 누군가 자신을 자꾸 뚫어지게 쳐다본다며 내게 수줍게 고백하는 너의 그 마음을. 자, 그러면 이제까지 엄마가 살아오면서 해온 flirt 이야기를 해줄게.

    옛날 옛적에 머리를 짧게 깎은 내가 살았지.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챌 수 없게. 가끔 머리를 귀 밑까지 기른 적도 있었지만 그 긴 머리가 학교에 있는 내내 괜히 신경 쓰이는 날이면 미장원으로 달려가 미장원 아줌마가 정말 그렇게 짧게?라고 물을 정도로 머리카락을 가만 놔두지 않았어. 네가 남자인 줄 알았어, 남자애 같은데?라고 말을 걸어오는 친구들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열두 살의 나는 세련되지 못한 관종이었다. 그리고 교복을 입고 나서는 집에 있는 술을 몰래 숨어서 마셨지. 만취해서 전화기를 붙들고 나라 잃은 백성처럼 가슴을 치며 울었어. 교복을 벗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당당히 공개적으로 취했고, 누군가, 꼭 남자에게만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는 개소리를 해댔지, 노래를 불렀고, 문자까지 남겼어. 그리고 나중엔 진짜 미안하다고 해야 했을 텐데. 자니? 그러니까 네 마음을 사로잡겠다고, 20년 만에 다시 술꾼이 되어, 알코올 섞인 눈물을 줄줄 흘리며, 네 앞에 무릎 꿇은 나를 보게 될 지경까지 너를 어렵게 하면 안 되겠지?

   일정 기간마다 출산을 반복하는 것만 같은 관계 변화 끝에 우리에게 찾아올 평화의 모습이 과연 어떨지 궁금해진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아이였을  잘 몰라도 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어른이 다 되어 내 곁에서 자라는 아이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정말 &dgjlㄷㄳㄴ9ㅔㅇㅅ89ㄷㅈㄳㅂ894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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