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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Mar 09. 2022

   스쿨버스가 온다. 멀리서도 딸아이가 버스 기사 옆에 서 있는 게 보인다. 무슨 일일까, 물어봐도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겠지. 아이에게 속상한 일이 생겼다는 게 분명한데도 걱정과 동시에, 그 걱정만큼의 농도로 짜증이 난다. 딸아이가 버스에서 내린다. 괜찮아? 손가락으로 눈을 찔렀다는,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모를 대답을 남긴 채 아이는 울면서 집 쪽으로 뛴다. 둘째가 버스에서 뒤늦게 뛰어내려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소리치며 쫓아간다. 딸아이가 뛰는 속도를 높인다. 뛰어가는 아이들을 뒤따라 걸으며 나는 투명한 액체 괴물이 된다.

   딸아이가 더 이상 스쿨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아이가 우리한테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과 그에 대해 학교 측에서 그 어떤 조치라도 취해 주길 바란다고 정중한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은 아니, 왜 우리 애가 스쿨버스를 안타, 걔네들을 못 타게 해야지!!!!라고 화를 내는 거였다. 둘째는 앞으로도 계속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이번 달까지만 재택근무인데 다음 달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우리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기로 한 뒤 마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남편 회사 사장님께 편지를 올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당신 회사 직원의 아내입니다, 로 시작해 남편의 영원한 재택근무를 바란다고 애원하면서 부디 제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로 끝마치다 육백만 불의 사나이 운운하며 연봉협상을 시도해보.

  학교 웹사이트에 게시된 스쿨버스 안에서 학생이 지켜야 할 규칙과 규제에 대해 읽어보았다. 규칙을 한 번 어겼을 때부터 네 번 어겼을 때까지 규칙 위반자가 받는 벌칙이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했다. 교장 선생님도 지금으로서는 우리한테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한다. 스쿨버스 운전기사님에게 학교에 리포트를 제출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그나마 우리로서는 최선이었다. 걔네들이 스쿨버스를 못 타게 하려면 딸아이가 한 번 더 그 아이들과 갈등 상황을 겪어야 되는데 그러려고 억지로 아이를 버스에 태우는 건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화가 난 남편은 걔네들을 확 때려주라고 딸아이에게 말했다가 욕을 먹었다. 목격자가 많은 데서 걔네한테 한 대 맞는 건 어떻겠냐고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딸아이는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둘째가 친구 집에 놀러 간 토요일 오후, 나와 남편과 딸아이는 집 근처 실내 양궁장에 처음으로 가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양궁을 하러 가자는 남편의 의도가 석연치 않지만, 다 쏴 죽이자는 거야, 뭐야, 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궁금했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양궁을 잘하도록 타고 난 건지.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는 그 장소에서 오랜 시간 일해 온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가 있다. 양궁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로 쓰는 눈이 오른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원에게 안전 교육을 받고, 활 잡는 법, 화살 끼우는 법, 활 쏘는 자세 등을 간단히 배우고 실전에 나섰다. 양궁이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운동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활시위를 당겼다, 놨다. 과녁은 침묵했다. 양궁은 소리의 운동이라는 깨달음으로 활을 쐈다. 피융.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퍽. 절제된 자세와 침착한 마음으로 화살 6발을 다 쏘고 뒤로 물러나 나는 흥분했다. 이거네, 내가 기다려 온 나의 운동. 몸은 최소한으로 움직이지만 결과는 극적이고 파괴적인 것, 누군가와 같이 하면서도 따로따로 인 것, 들끓는 잡념이 모두 멈추는 강력한 순간의 반복.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던 처음이 점차 나아지는 과정을 겪고, 적어도 중심에 가까운 각자의 그럴듯한 한 발을 얻은 채로 토요일 오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한결 기분이 좋아진 딸아이와 얘기해 언젠가는 스쿨버스에 다시 탈 수도 있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소리를 되새기며 나는 딸아이를 괴롭힌 아이들이 퍽, 퍽, 퍽, 학교에서 연락을 받은 부모님에게 심하게 혼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스트레스받은 걔네들이 딸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댈지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다음엔 내가 무슨 을 저지를지 나조차도 알 수 없어진다. 교장실에다 걔네들이랑 걔네 부모님들을 다 불러다 놓고 단 한순간의 후회도 남기지 않을 칼춤을 춘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은 사격장이냐? 남편에게 물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그의 표정을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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