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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May 25. 2023

아 주머니

   어느 의류브랜드 웹사이트에서 주머니가 앞뒤옆으로 주렁주렁 달린 반바지를 보았다. 순간 예전에, 스물몇 살의 내가 무척 좋아해 자주 입었던 주머니 반바지와 주머니 티셔츠 생각이 감전시킬 기세로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그런 김에 주머니를 입고 다닌 장소와 만난 사람들까지 기억해 보려 무진 애를  써보았는데 무리였다. 정신 차리고 보니 너무 오랜 세월이 단박에 흘러 지나가버린 이다. 새로운 나날의 거칠고 부지런한 입력이 마침내 나의 지난 기억을 서서히 압도해 버린 이다.


   몸에 걸칠 옷에 달린 모든 주머니의 용도와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 가방 대신 주머니만을 이용하여 살던 때가 있었다. 비록 그 속이 은박종이로 싼 구슬 같은 씹던 껌과 밥 먹고 입 주변을 닦은 냅킨과 잃어버리지 마 지폐, 동전, 교통카드로 뒤섞인 공허였을지라도 절대 굴하지 않으며 말이다. 그리하여 멀쩡히 길을 다 갑자기 멈춰 서서 주머니마다 차례로 손을 집어넣고 갈 곳을 잃은 듯 그 안에서 막 헤매는 사람은 바로 나이거나, 내가 아니라면 길에서 처음 본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중인지, 결국 찾을 건지 궁금해하고 응원해야만 한 시절이었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와 정안이 해준의 주머니를 야무지게 헤집을 때 해준이 되었다가 서래와 정안이 되어보았다가 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황홀했다. 이건 누군가에게 집이 될 것인가 방문자가 될 것인가 기생충인가 하는 문제일지 모른다. 소중하거나 홀대받거나 그 존재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가져갈 것인가, 빌려갈 것인가, 그대로 둘 건가의 경쟁일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경계를 스스로 천천히 지워나가며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너 가방 속에 뭐 있어?라는 물음에 기꺼이 가방 안에 있는 것들을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의 주인 앞에 속속들이 꺼내어 보여주고, 그것이 거기 있는가를 술술 얘기하거나 이건 도대체 왜 여기 있나,를 함께 고민해 보았던 일. 그렇다면 나의 주머니 반바지와 티셔츠는 어떻게 되었는가. 실체 없는 형상이 되었다. 내 곁에는 없지만 그 안에 있다. 입고 있지 않지만 벗은 적도 없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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