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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Mar 04. 2022

더운 겨울

  

    플로리다에 갔었다. 아이들의 겨울방학이었다. 디즈니 월드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비행기가 올랜도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벌써 집이 그립다고 둘째가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출발과 도착 사이에서만 실감 나는 지난 생활과 감정이 있어, 떠나온 사람과 장소가 애틋해지는 것뿐일 것이다. 플로리다의 밤은 여름이었다. 우리는 겨울 외투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긴 옷소매를 모두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돌아갈 곳의 날씨가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이제 막 여행이 시작된 사람들의 흥분 속에서 남편과 똑같은 속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바지를 바짝 추켜올려주고 싶었다. 남편과 아들의 존재로 인해 세상 모든 남자들을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내 낭만의 찌꺼기에 대하여 애도할 정신은 없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남편 속옷을 더 이상 아마존에서만 살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디즈니 월드에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줄 서기, 지시 따르기, 기다림 끝에 얻는 반전 없는 즐거움, 핫도그, 떼쓰는 아이들, 소리치는 어른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은 디즈니 월드에 전부 모여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 커다란 음악 소리, 팝콘 냄새, 꺄르륵거리는 아이들, 애처럼 즐거워하는 어른들, 헬륨이 들어있는 풍선, 타인을 대하는 능숙한 친절, 불꽃놀이. 우리는 정해진 곳에서만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를 벗고 돌아다니는 걸 아이들이 어색해하면서 즐거워했다.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주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아이들의 눈동자는 사방을 굴러다녔다.

   히잡을 쓴 여인이 지나갔다. 터번을 머리에 올린 남자는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여성이 담요를 덮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임산부를 보았다.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아이가 유모차에 잠들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진, 전진. 이 행군의 목표는 기다림. 햇살이 눈부셔 잠깐 눈을 감고 걸었다. 팔뚝만 한 신생아를 보았다. 한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남자가 있었다. 둘째가 솜사탕을 사달라고 해서 짜증을 내며 사주었다. 아이의 손가락과 손바닥이 끈적끈적해지고 입 속은 파랬다. 팔다리가 온통 문신인 여성을 보았다. 단체로 놀러 온 여자 고등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컸다. 놀이 기구에 묶여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지르는 즐거운 비명을 들었다. 겁에 질려 악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왜소증에 걸린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세 아이 중 가장 큰 아이만 엄마와 닮은 몸이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스타벅스 머그도 샀다. 운동화 밖으로 새어 나오는 발 냄새를 맡았다. 해가 지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놀이 공원을 험했다. 남의 아이가 울면서 바닥을 기어 다녔다. 롤리팝을 입에 문 할머니가 걸어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유모차를 미는 남자의 걸음이 느렸다. 유모차를 타고 가는 미니 마우스 인형을 보았다. 여자 아이 하나가 이름 모를 하얀 새를 뒤쫓았다. 손잡고 걸어가는 두 여성이 웃었다. 어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휠체어를 잠시 양보했다. 아이의 보모와 함께 다니는 가족이 있었다. 진실과 경청이라는 한글 로고가 붙은 크로스백을 맨 여자를 보았다. 40년째 결혼 생활 유지 중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맞춰 입은 노부부가 지나갔다. 흰 눈썹의 남자가 있었다. 유모차를 탄 다운증후군 청소년을 보았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면서 대화하는 여자들의 영국 악센트를 들었다. 다양한 색과 모양과 무늬의 나이키 운동화를 구경했다. 종아리에 새끼손톱만 한 점이 있는 남자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왼손이 없는 여자가 있었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소년이 휠체어를 타고 달려갔다. 놀이 기구를 타려고 혼자 한 시간 넘게 줄을 서 있는 동양 남자를 발견했다. 아동용 휠체어를 제 몸 다루듯 하는 남자아이가 여동생과 싸웠다. 어른이 된 딸에게 전화를 걸어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중계하는 늙은 아빠가 있었다. 딸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으며 디즈니 월드의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플로리다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밝았다, 자꾸 날이 바뀌며 밝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고릴라를 보았다. 나를 잡아다 모형 집 안에 죽을 때까지 살게 해 달라고, 살 때까지 죽게 해달라고 스스로에게 애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여행은 완벽한 통제, 완전하게 잃는 통제로 전복되고 회복되는 일상, 삶의 모형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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