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4년 전, 민우가 아직 입대하기 전이었다.
학교에는 경하의 소문이 먼저 돌았다. 연예인이라거나 재벌가 외동딸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경하가 복도를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그쪽으로 쏠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기가 잠시 고요해졌다.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중심에 서 있었다.
가까이 스치면 고급스러운 향이 은은하게 남았다. 과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향이었다. 웨이브 진 머릿결은 결코 아무렇게나 손질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전문가의 손길로 정성껏 다듬어진 듯 윤기가 흘렀다.
웃을 때면 눈웃음이 매력적이었고, 말투는 낮고 또렷했다. 한 번도 큰소리로 웃지 않았다. 좋은 옷은 몸에 자연스럽게 얹혀 있었고, 로고 하나 없어도 그 가치가 느껴졌다. 계산할 자리가 생기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계산해도 될까요?”
그러고는 늘 망설임 없이 가장 먼저 지갑을 열었다.
그녀가 강의실에 들어서면 여학생들은 손을 흔들어 반겼고, 남학생들은 작은 탄성을 흘렸다.
“우와.”
경하는 그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제자리로 가 앉았다.
캠퍼스 안에서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 후배들은 경하를 발견하면 달려와 인사를 건넸고,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레 묻곤 했다. 그녀는 흔쾌히 응했고, 가끔은 가방에서 향수 샘플을 꺼내 나눠주기도 했다.
교양 수업이 끝난 뒤, 복도는 다음 강의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로 소란스러웠다. 그때 한 학생이 민우를 불러 세웠다.
“선배, 지난 학기에 휴학하셨어요?”
“응. 왜?”
“아니, 전 선배 군대 가신 줄 알았거든요.”
“군대는 다음 학기에 가려고.”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묘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 곁에 있던 경하가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지만, 민우는 짧게 목례만 한 뒤 다른 후배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나 간다.”
그는 그대로 돌아서 긴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늘 따뜻한 시선 속에 머물던 그녀에게 그의 무심함은 낯선 감각이었다. 자신을 그저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으로 대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렸다.
경하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
“저 선배, 이름이 뭐예요?”
“응? 아, 박민우 선배.”
박민우.
그녀가 처음으로, 어떤 남자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또박또박 되뇌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일주일 뒤, 텅 빈 강의실에서 민우는 전공 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라 오늘 중으로 반납해야 했다. 필요한 부분을 서둘러 정리하며 다시 눈에 담았다.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며 경하가 들어왔다. 민우를 발견하자 그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경하는 조용히 민우의 옆자리에 가방과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민우가 잠시 고개를 들어 인사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하는 그 무심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멈춰 섰다.
“선배, 혹시 커피 드실 거면 한잔 사다 드릴까요?”
경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우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강의실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제 것만 사 왔거든요. 제가 빨리 다녀올게요.”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어서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민우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빈 강의실에 은은한 꽃향기와 커피 향이 맴돌았다.
민우가 노트북에 자료를 입력하고 있을 때, 경하가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선배, 이거 드세요.”
민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경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맑은 눈과 고른 치아, 그리고 투명할 정도로 뽀얀 피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외모였다. 마치 연예인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선배, 말씀 낮추시고 편하게 하세요. 저는 ‘주경하’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경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우는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아, 네. 경하……. 이름이 예쁘네요.”
민우가 고개를 떨구며 얼버무리자, 경하가 조금 더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선배, 이름만 예뻐요?”
당황한 민우가 고개를 들어 경하를 바라보았다. 경하는 눈을 반달처럼 휘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민우를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고, 텅 빈 강의실에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민우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경하가 참지 못 하겠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웃는 얼굴 처음 봐요.”
민우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랬나.”
그날 이후 경하는 틈만 나면 민우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군대는 언제 가는지, 졸업하고 가면 안 되는지, 아르바이트는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음악이나 음식을 좋아하는지. 수많은 물음이 오갔지만, 민우는 경하에게 단 하나의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저 묻는 말에 짤막한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그런 무심함은 오히려 경하의 호기심을 더 강하게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될 무렵, 경하가 수업을 마치고 민우에게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민우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오늘은 안 되는데.”
“왜요? 아르바이트 가요?”
“아니.”
“그럼, 약속 있어요?”
“아니……. 그냥, 오늘은 좀 그래.”
경하는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것을 겪어보았다. 딱히 대단한 이유도 대지 않은 무심한 거절이었다.
'내가 싫은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결국 친한 선배 언니를 찾아가 물었다.
“민우 선배, 원래 저래요?”
“응, 걔 원래 그래. 한 학기 다니고 한 학기 휴학하고 그러느라 동기들도 없고, 맨날 혼자 다녀. 여자들한테도 전혀 관심 없고.”
“왜 그렇게 휴학을 자주 해요?”
“얘는, 왜 그러겠니? 돈이 없어서 그러겠지. 원래 워낙 말이 없는 애라 나도 잘은 몰라.”
경하는 돈이 없어서 휴학을 밥 먹듯 한다는 민우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경하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부에 퍼졌다. 후배들 사이에서 민우는 ‘미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미친놈' 아니면 '신'이라는 우스갯소리였다. 누구나 단번에 무너뜨릴 것 같은 여신의 공세를 단칼에 베어버린 민우는, 어느덧 모태 솔로 후배들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민우는 평소처럼 무심하게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오갔지만, 경하의 일상은 그 소문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미신' 이야기를 듣던 경하가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야, 그때 진짜 자존심 상했다니까. 많이는 아니고, 조금?”
경하가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려 '조금'을 표시해 보였다.
“와, 그 선배는 왜 그랬대?”
“글쎄, 모르겠어. 아무튼 그 선배 정말 대단하더라. 하하. 나도 그렇게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거든.”
경하가 환하게 웃어넘기자, 친구들도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경하에게 그 일은 그저 친구들과 나누는 가벼운 일상일 뿐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 한구석에는 박민우라는 이름이 아주 조용히, 그리고 깊숙이 매립되어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경하는 아래층 B-32 강의실로 향했다. 민우가 수강하는 전공 수업이 열리는 곳이었다.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뒷문 너머로,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넣는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강의실 문을 나서는 그를 경하가 가로막아 섰다.
“선배, 오늘 시간 좀 있어요?”
민우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이제 아르바이트 가야 하는데. 무슨 일인데?”
“그럼, 버스 타고 가요? 아니면 전철?”
“응. 오늘은 버스 타면 한 번에 가.”
“선배, 나랑 이야기 좀 하고 제가 태워다 드리면 안 될까요?”
민우가 잠시 망설이자, 경하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10분이면 돼요. 강의동 앞 벤치도 좋고, 뒤에 있는 카페도 좋고요.”
경하는 머뭇거리는 민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민우는 곤란한 표정으로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더니,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나섰다.
벤치에 나란히 앉자, 경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와, 날씨 좋다. 오늘 같은 날 드라이브나 갔으면 좋겠네요.”
민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경하를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인데?”
경하가 장난기를 지우고 정색하며 물었다.
“선배, 오늘 아르바이트 끝나면 저녁 식사 할까요?”
민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늘 늦게 끝나는데.”
“몇 시요? 9시면 끝나잖아요.”
민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아?”
경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선배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민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괜히 어색해진 발목만 빙빙 돌릴 뿐이었다.
“미안하다. 사실 나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고. 너를 우습게 봐서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경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목소리에는 변명이 아닌, 짙은 피로가 섞여 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죠?”
“그럼. 내가 널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경하가 조금 안심이 되었다는 듯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죠?”
민우가 아무런 대답 없이 물끄러미 경하를 바라보았다.
경하가 손사래를 치며 민우의 말을 막아섰다.
“됐어요. 더 이상 얘기하면 저 또 상처받을지도 몰라요. 차로 태워다 드릴게요. 가요.”
민우가 백 팩을 어깨에 둘러메며 말했다.
“괜찮아. 버스 타고 가도 시간 충분해.”
민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손만 한번 가볍게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경하의 손끝이 잠시 허공에 멈춰 있었다.
경하는 멀어지는 민우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 나만 바라보게 만들어 볼까.”
얼마 후 민우는 군대를 갔다는 소문이 돌았고. 더 이상 캠퍼스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