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무게
검은 양복이 룸미러를 통해 민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렷하게 말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1팀장이라고 합니다. 경하 님의 경호팀 소속입니다.”
“경하가 저를 감시하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감시가 아니라 경호입니다.”
“저를 경호하라고 했다고요?”
“네. 맞습니다.”
“왜요?”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라니요?”
“네. 저희 네 명이 1개 팀입니다. 낮과 밤을 교대로 경호합니다.”
“저를요?”
“네. 그렇습니다.”
“왜요?”
“그건 저희도 그저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경하 님께서 민우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드리라고만 지시하셔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네 명.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네 명의 시선이 밤낮으로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에 민우는 기가 막혔다.
24시간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 민우를 더 화나게 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많은 인력을 투입한 걸까. 괘씸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민우는 지금 벌어지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감시 대상을 경하가 지정했나요?”
민우의 목소리에 화가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감시가 아니라 경호입니다. 대상이 정해지면 저희는 그저 경호업무를 진행할 따름입니다. 민우 님은 대기 경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대상. 민우는 이들에게 자신이 그저 ‘업무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이 더 허탈했다.
“그럼, 오늘은 어디까지 태워줄 수 있나요?”
민우는 이들의 경호 영역이 어디까지일지 궁금해 물었다.
“원하시는 곳 어디든 모셔다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M시의 병원까지요?”
“네. 문제없습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경하에게 따지더라도 지금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민우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던 선미는 검은 세단이 등장하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두 눈을 깜빡이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타.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M시의 작은 병원까지는 고속도로를 달려도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차가 출발하고 민우의 설명을 들은 선미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이동하는 내내 불안한 기색을 떨쳐내지 못했다.
민우는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철우의 일도 자세히 털어놓았다. 선미는 기가 막혔다. 이따금 소름이 돋는지 자기 팔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민우가 검은 양복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팀장님은 어디 소속이신가요?”
“네. 저희는 KABEST 소속입니다.”
대한민국 굴지의 전자 회사. 최근 반도체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는 소식이 민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TTC랑은 어떤 관계인가요?”
“네. TTC는 저희 계열사입니다.”
“아—”
민우와 선미가 동시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병원에 도착했다. 검은 양복이 민우에게 조그만 USB 같은 장치를 손에 쥐여주었다.
“저는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이 버튼을 눌러주세요.”
민우는 작은 버튼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넣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상황이 어떻든 지금은 도움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의식이 있었다. 선미를 보고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인공호흡장치를 달고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마스크 너머로 가쁜 숨이 오갈 때마다 희뿌연 습기가 서렸다. 선미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담당 의사는 폐렴인 줄 알았으나 검진 결과 초기 폐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수술만 하면 두 달 뒤에는 퇴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곳 병원에서는 수술이 일주일 뒤에나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병원 측은 수술 날짜가 확정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민우는 철우와 통화하며 서울로 모실지 고민했지만, 수술 후 누가 남아 간병을 할지 다들 막막하기만 했다.
병원 입구 정원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할 때, 민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경하였다.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선미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경하가 잠이 덜 깬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아버님은 좀 어떠셔?”
민우는 체념한 듯 상황을 설명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경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좀 도와드려도 돼요?”
민우는 이 상황에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선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글쎄요. 알아보고 연락해 줄 테니 그냥 올라가 계세요. 선배가 지금 거기 계셔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제가 한 시간 내로 연락드릴게요.”
경하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힘이 있었다. 민우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선미는 여전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있었지만, 경하의 목소리를 들으니 막막했던 마음 한구석에 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선미는 아버지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민우는 병원 로비를 서성거렸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40분쯤 지나 경하에게 연락이 왔다. 앰뷸런스가 출발할 거니 선배도 올라가라고 했다.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내일 바로 수술할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다며, 자세한 사항은 1팀장이 전해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선미와 의료진이 링거와 산소호흡기를 단 아버지의 침대를 통째로 밀고 내려왔다. 밖에서는 앰뷸런스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뒷문을 열어놓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다가온 1팀장이 조용히 설명했다. 우선 S대 병원으로 이동할 것이며 자신이 모시겠다고 했다. 그는 수술 일정과 담당 의사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였다.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출발했고, 선미는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한 뒤 세단에 올랐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예정에도 없던 수술은 다음 날 밤에 이루어졌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아버지는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아버지는 곧 간호 병동으로 옮겨졌다.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이라 보호자가 상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주는 경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민우는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어디까지 빠져들고 있는 건지 불안해졌다. 선미와 민우는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민우의 생활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선미와 김밥에 컵라면을 나눠 먹는 잠깐의 행복조차, 멀리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더는 전과 같지 않았다.
계절은 어김없이 달력 한 장만을 남겨두었고, 길거리에는 캐럴이 들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종강했고 선미는 조기졸업을 목표로 계절학기를 신청했다.
민우는 부족한 학점을 채우며 내년에는 어떻게든 선미와 함께 졸업하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방학 동안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선미 아버지는 퇴원해 M시로 내려갔다. 선미가 서울에서 함께 살자고 몇 번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이유로 끝내 집으로 돌아갔다.
모처럼 늦잠을 자던 민우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경하였다.
“선배, 잘 지내셨어요? 저 오늘 한국에 도착했는데 이따가 저녁, 같이 하실래요?”
“어, 그래. 좋아. 장소 정해서 문자 보내줘. 참, 그리고 6시 이후면 나 여자 친구랑 같이 갈 수 있어. 그래도 될까?”
경하가 다 알고 있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요. 저야 영광이죠. 선배 여자 친구도 볼 수 있다는 게.”
-계속-